설교말씀 모아/Dongan 주일 및 기타예배

동안교회 주일 4부 예배 말씀 기록_241215

Choorysostom 2024. 12. 31. 15:41

241215 주일4부예배
정은광목사님
창세기 4. 1-8
제목: 우리의 기준 1, 예배

 

<요약>

성경의 기준 세가지중 첫번째 예배. 가인과 아벨의 예배는 무엇이 달랐을까. 

가장 귀한 것을 구분하여 드리고, 삶의 예배를 드리며, 하나님을 내 마음 가운데 모시는 예배. 가인은 그 예배가 바로 서지 못하였다. 주님께 물들듯 아벨의 예배를 드리길 소망한다.

 

<본문>

1 아담이 그의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임신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하니라
2 그가 또 가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는데 아벨은 양 치는 자였고 가인은 농사하는 자였더라
3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4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5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6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 됨이냐
7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8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에게 말하고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


<설교>
2년 전 신혼마을로 가며 인사했던게 기억나는데 다시 돌아왔습니다. 
그렇게 함께 나누고 싶은 마음을 고민하다, 대림절 간증 여러가지 중에 고민하다 조직개편을 생각하며 기준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이 기준을 잡고 나아갈 방향을 잡고 길을 이탈해도 다시 돌아가기 때문입니다.
성경의 기준은 세가지입니다. 예배와 기도와 말씀. 이세가지를 3주간 나누겠습니다.

오늘의 본문은 우리가 모두 잘 알지만 매우 끔찍한 본문이다. 이 말씀은 첫 설교로는 부담스럽지만, 단순히 살인이 아니라 어떤 예배를 드려야 하는지가 나오는 본문이다.
1절에는 아담이 하와와 동침하며 가인을 낳고 여호와로 인하여 득남하였다고 한다. 창세기 3장에서는 선악과를 먹고 쫓겨난다. 반드시 죽으리라는 소리를 들었음에도, 바로 죽이지 않고 첫 약속인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약속을 잊지 않고 자녀를 주신다.
자녀의 축복이 하나님께 있음을 안 하와는 이 은혜를 고백한 것이다.
아벨에는 특별한 이름이 없다. 그런데 이 아벨은 공허와 허무 라는 뜻이 있다. 아담과 하와가 어떤 대우를 했을지를 짐작할만한 대목이다. 어쩌면 편애가 있었을수도 있다.
하지만 이후에 둘의 삶의 태도는 매우 달랐다.
3절에 세월이 지난 후 라고 기록되어있다. 얼만큼인지는 모르지만 일단 수확시기가 끝난 이후일것이다.
그리고 이 세월에 쓰인 단어는 끝이 있음을 표현하는지라 종말을 표현하기도 한다. 이게 표면적으로는 한 계절이 마칠때를 의미하지만 다르게 보면 종말때에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가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때에 어떤 제물을 바쳐야 할까.
사도바울은 딤 4.6에서 죽을날이 가까웠고 나의 생명을 제단에 드렸다고 한다. 이렇게 종말의 때에 우리의 삶 자체가 제물로 드려지는 하나님을 향한 예배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이 제사는 삶으로 드리는 예배이다. 바른 예배는 무엇일까.

첫번째는 가장 귀한 것을 구별하여 드리는 것이다.
예전에는 가인이 피를 안흘리는 제사라서 못받았다 라는 이야기도 있었지만, 레위기에는 동물제사도 곡물제사도 있었다.
창세기 4장 3~4절을 보면 가인은 땅의 소산을 드리고 아벨은 첫 새끼를 드렸다고 한다. 신명기 26.2에도 땅의 소산 중 맏물을 드리라고 한다. 가장 좋은 것을 드리라고 하는 것이다. 그런데 농사를 지을 때는 이 맏물을 따로 챙겨야 내년도 농사를 지을 수 있다. 양과 같은 가축도 첫 새끼를 잘 돌보고 길러야 한다. 그렇기에 농사와 목축의 첫 새끼를 드리는 것은 내년과 다음 가축에 대한 불안함도 맡겨드리는 것이다. 
이렇게 모든 주권을 하나님께 맡기고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고백하는 행사이다.
이렇게 첫 새끼를 드리고 내 삶의 주인이 하나님임을 고백하며 드리자는 것이다. 이렇게 가장 귀한 것을 드리며 나아가는 우리가 되길 소망한다.
그런데 드리는 제물만 보고 오늘 본문을 보면 하나님을 마음이 좁은 사람으로 보이기도 한다. 하나님이 안가르쳐주었는데 어떻게 잘 드리나.
그런데 가인에게는 다른 단점도 있었다.

두번째 바른 예배는 삶의 예배를 드리는 것이다.
하나님은 제물의 상태만 보았다면 참 실망스럽겠지만, 자세히 보면 재물만 본것이 아니다.
창 4. 4~5절에는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았으나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않으셨다고 한다.
제물이만이 아니라 가인과 그의 제물 아벨과 그의 제물이다. 하나님은 단순하게 제물의 상태만을 보고 받고 말고가 아니라 제물을 드리는 사람의 상태까지 보고 받고 받지 말고 하시는 것이다. 
이 받다의 히브리어는 샤 라는 단어인데 주목했다라는 단어이다. 하나님은 제물만이 아니라 제물을 드리는 가인과 아벨의 삶을 주목하고 나가신 것이다.
이들의 제사를 보고 히브리서 11.4에는 믿음으로 아벨이 증거를 얻었다고 한다. 아벨은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가지고 온전한 제사를 드린 것이다. 믿음의 삶으로 제사를 드린 것이다. 하나님 앞에 믿음으로 삶을 드릴 때 우리의 제물을 받고 우리에게 의로운 자라고 하시는 것이다.
우리의 삶을 통해 우리의 삶의 중심 가운데 그 고백이 끊이지 않도록 하자.
우리의 제사보다 태도가 중요한 것임을 알아야 한다.
사울의 경우에서도 이 태도를 알 수 있다. 아말렉을 공격하라고 말씀하신 하나님. 아말렉이 출애굽을 방해했기에 공격하라고 하셨던 것이다. 그렇게 진멸하라 하셨지만, 사울은 가장 좋은 재물들을 챙겨두었다.
사무엘이 뭐라 하자 제사를 위해 좋은 것을 구별하였다고 한다. 그러자 사무엘은 15장 22절에서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낫다고 한다.
좋은 제물보다 우리의 삶이 하나님께 드려지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 삶의 모습 가운데 하나님을 예배하는 사람이 더 중요한 것이다.
하나님의 임재연습이라는 로렌스형제의 책이 있다. 이 로렌스형제는 프랑스 갈멜 수도원에 있었으며, 전쟁 후유증으로 수도원 구석에서 보이지 않는 일들을 하였다. 그런 허드렛일을 하면서도 하나님의 임재가 충만하기를 간구하여, 자신의 일상 가운데 오신 하나님을 기록한 것이 이 하나님의 임재연습이다.
그의 하나님을 삶에서 만나는 경험이 소중하기에 3백년이 지난 지금도 그 삶이 우리에게 큰 귀감이 된다.
이렇게 주중에도 하나님을 기억하는 예배자의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이다. 큐티하고 말씀읽고 기도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이다.
각자의 셀별로 나눔의 시간으로 더욱 많은 사람들이 함께하길 소망한다.
이런 로렌스형제와 다르게, 가인은 그러지 못했다. 그래서 이렇게 된 것이다.
이런 예배의 부재는 예배에서 끝나지 않고 적반하장으로 나오게 된다. 가인은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게 되었다. 분하였다는 원어를 보면 맹렬하게 타오르다 진노하다 미치다 라는 의미이다. 이게 단순히 아벨이 아닌 하나님께 진노하는 것이다. 
도입부처럼 가인은 세상에 주목받는 삶을 살며 태어났다. 모든 사랑을 독차지하였을 것이다. 그에 반해 아벨은 주목받지 못하였다. 인간적인 기준으로는 가인이 더 잘하고 잘나가야 하는데 그들의 삶에서 그렇게 되지 못한 것이다. 자신이 아닌 하나님이 주목받는 예배자의 삶을 살아야 하는데, 더 나아가면 지금의 삶보다 내가 이 생을 마칠때 예배자인지가 중요한데, 우리가 제물이 될 수 있는지가 중요한데 그렇지 못한다.

세번째 바른 예배는 하나님을 내 마음 가운데 모시는 것이다.
가인은 아벨을 죽였다. 우리는 이 사건을 가인과 아벨만의 사건으로 생각할 수 있지만, 이 죽였다는 동사는 미완료형으로 기재되어 있다.
이 사건은 가인과 아벨의 사건으로 끝이 아니라 우리 삶에서도 일어날 수 있다는 의미이다.
누굴 죽이지 말란 말만이 아니다. 가인이 악한 자여서가 아니라 악함 가운데 멈춰있었기 때문인 것이다.
우리가 삶으로 하나님과 교제하지 않았을 때 우리 안에 악함이 이기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과 함께 살아가고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실 때에 우리에게 귀한 삶을 사는 것이 가능하게 될 것이다.

나영자 시인의 염색이란 시가 주님을 참 잘 표현했다.
그냥 주님으로 푹 물이 들었으면 좋겠습니다.
물감으로 물을 들이듯 주님께 물들었으면 좋겠습니다.
가르침과이 따로가 아니고 깨달음이 따로가 아니듯 그냥 주님에게 물이 들었으면 좋겠습니다.
말을 잘하지 못하고 대단하지 못해도 물이 들었으면 좋겠습니다.
(원문이 아닌 축약임)

오늘 인류의 첫 살인을 보며 예배자의 삶을 살펴보았다. 청년으로 사는 것도 힘들고, 조직개편으로 마음을 잡기도 힘들 것이다. 그래서 기본으로 돌아가 주님의 마음을 이 가운데 잡길 원한다.
그렇게 우리 삶을 향하여서 의롭다 칭함을 받는 우리가 되길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