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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니엘기도회 말씀 기록_240424

설교말씀 모아/기타 예배 등

by Choorysostom 2024. 5. 21. 1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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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424 다니엘 기도회 아가서 1.5.

박광기목사님


예수믿기 시작한 청년의 때가 기억난다.
아들들이 사랑스럽지만 가끔 이 아이가 고난을 겪을 걸 생각하니 가끔 눈물이 난다. 청년들도 그렇다.

힘든 청년들이 올 때, 해줄말은 지나기는것 밖에 없다. 
멘토목사님이 요즘 목사가 많으니 세상으로 나가라고 하셨다. 그래서 대3때 은혜받고 무얼할지 생각하고, 대학교에서 은혜받았으니 대학교수가 되자 생각하고 32살에 교수가 됐다

우리는 교회 개척을 하면서, 한국교회는 계급화되어있고, 신앙생활이 교회생활이고, 교회가 종교화(미신화)되어있다. 참고로 복음의 반대는 종교이다.

종교는 나로부터 출발하는 것. 내 어려움을 해결해줄 신을 찾는 것. 기독교의 종교화도 내가 잘되길 원해서 하나님을 찾는 것.
복음은 반대로 하나님이 우리를 찾아오시는 것.
소명이란 책에는 위대한 하강(빌립보소 2장 6절에서 8절 참고)이라는 얘기가 있다.
예수님이 낮아짐같이, 우리도 낮아져서 남이 잘되는게 복음이다.
우리는 항상 원수를 사랑하지 못한다. 담배피고 악한 사람이 오는 곳이 교회다.
그러나 우리는 위대한 상슥만을 꿈꾸기에, 항상 복음이 종교화된다. 순종하면 복받는 것을 안믿고, 복받으려고 순종한다. 

이경규의 양심냉장고이라는 프로그램이 있었다. 아무도 안볼 때 신호를 지키는 사람에게 냉장고를 주는 것이었다. 그때 한번, 미리 제작진이 온다는 걸 알고 정지선을 지키는 차량도 있었다. 그런게 우리의 종교화이다.
우리 교회 안에도 잘하는 것을 쫓는 그런 것들이 많다.

요한일서에 우리는 세상을 이긴다든 말씀이 있다. 세상에서가 아니다. 그건 종교이다. 예수님은 세상 '을' 이기셨다. 우리의 복음은 그 예수의 승리에 동참하는 것이지, 우리가 이기는 것이 아니다.

어느날 설교에 항의한 사람이 있었다. 그 설교는 4세기 교부 요한 크리소스톰의 설교였다. 제목이 우리는 어린 양으로 쳔마리의 늑대에게 승리한다 였다. 우리가 어린양으로서 늑대를 이기지 못한다. 하지만 우리는 목자의 어린양이기에 이길 수 있다는 것이다.

복음의 원어인 요안겔리온은 마라톤전투에서 승리한 소식을 전한것부터 나왔다. 그가 이긴것이 아닌, 국가란 우리가 이긴 것이다.
골리앗도 다윗의 힘으로 이긴 것이 아니다.
다윗이 아닌 하나님이 이기신 것이기에, 다윗의 승리가 이스라엘의 승리가 된 것이다.
예수님이 주무실때 분 광풍도 동일함. 우리가 죽게 된게 맞다. 그때 믿음이 작은자여라는 말은, 너가 광풍을 왜 못이겼냐가 아니라, 왜 내가 이길걸 믿지 못했냐는 것이다. 복음은 예수님을 믿는 것. 우리가 아니라 예수님이 이기시는 것을 믿는 것.
이런 복음이 공동체에 들어오면, 자랑하지 않는다. 

포도원비유에서, 아침이 지났는데도 남아있는 사람은 일하기에 적합한자들이 아니었다. 이 사람들이 몇시에 왔든 똑같이 준 이유는, 그 일을 해서 그런것이 아니라, 그 불쌍한 자들을 구제해준것이어서 똑같이 준 것이다. 우리가 일찍 온 사람이라면, 우리가 오래 있어서 더 받는것이 아니라, 누군가 들어와서 또 받을 사람이 늘어난 것에 감사해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를 일꾼으로 부른 것이 아니다. 우린 사랑하고 사랑받으러 만들어진 존재지, 효율적인 사람이 아니다. 일꾼이 아니라 자녀로 온 존재이다. Lovers will always outwork Workers라는 말처럼, 사랑으로 일하는 사람이 더 열심히 일한다.

돌아온 탕자에서 알듯, 우리는 뭔가 아버지와 간격이 벌어지면 아들이 아닌 품꾼으로 생각하게 된다. 돌아온 둘째아들만이 아니라, 첫째아들도 원어로 보면 아버지에게 충성된 노예 아니냐고 하면서 따진다.
우리도 하나님과의 관계가 멀어지면 일꾼이 되기 시작한다.
또한, 우리가 신앙이 없이 하는 모든 것은 무의미하다. 고린도전서 13장처럼, 신앙은 사랑이고, 관계이다. 미신화된 사람은 아무것도 못한다. 하지만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그러므로 내가 고난 가운데에 있을때도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힘든 가운데에서도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울면안되라는 캐롤송을 보면, 종교는 울지 않아야 선물을 주지만, 복음은 우는 아이에게 더 큰 선물을 준다. 

검으다 사랑답다는 것은, 솔로몬이 사랑했던 여인에 대한 이야기이다. 게바의 장막은 장막 겉에 치는 가죽으로 햇빛받으면 거매진다. 그럼에도 솔로몬은 이 사람을 사랑한 것이다.
우리는 가끔 새벽기도를 못나가는 등 못했을때 민망해하거나 죄송해한다. 하지만 그건 우리가 검지 않으려고 하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 생각보다 훨씬 형편없는 사람이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그보다 더 사랑한다.

호세아에게 하나님은 창녀와 결혼시키고, 그 사람이 도망가자 다시 처음처럼 사랑하라고 한다(호3.) 이게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사랑하듯 사랑하라는 말씀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강조하는 것이다.

아가서 2.4절에 His banner over me is LOVE 라고 되어있다. 이 상황은 술람미여인이 앉은 자리에 깃발을 꽃은 상황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과 같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이미 사랑의 깃발을 꽃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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