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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안교회 성탄 4부 예배 말씀 기록_241225

설교말씀 모아/Dongan 주일 및 기타예배

by Choorysostom 2024. 12. 31. 16:09

본문

241225 성탄4부예배
김형준목사님

 

<요약>

예수님을 맞이한 동방박사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첫번째로 구세주를 사모하며 기다린 사람이었다. 별이 잠시 안보일 때도 사모하며 기다렸다.

두 번째로 메시야를 찾아간 사람이었다. 내 눈 앞에 확실한 증거가 보이지 않을 때도 두세달 이상 먼 길을 따라서 찾아갔다.

세 번째로 메시야를 만나고 경배하는 사람이었다. 황금과 유향과 몰약으로 경배한 사람이었다.

우리도 혼탁한 시기에 이 동방박사들처럼 주님을 바라보고 살아가길 소망한다.

 

<본문>

1 헤롯 왕 때에 예수께서 유대 베들레헴에서 나시매 동방으로부터 박사들이 예루살렘에 이르러 말하되
2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냐 우리가 동방에서 그의 별을 보고 그에게 경배하러 왔노라 하니
3 헤롯 왕과 온 예루살렘이 듣고 소동한지라
4 왕이 모든 대제사장과 백성의 서기관들을 모아 그리스도가 어디서 나겠느냐 물으니
5 이르되 유대 베들레헴이오니 이는 선지자로 이렇게 기록된 바
6 또 유대 땅 베들레헴아 너는 유대 고을 중에서 가장 작지 아니하도다 네게서 한 다스리는 자가 나와서 내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리라 하였음이니이다
7 이에 헤롯이 가만히 박사들을 불러 별이 나타난 때를 자세히 묻고
8 베들레헴으로 보내며 이르되 가서 아기에 대하여 자세히 알아보고 찾거든 내게 고하여 나도 가서 그에게 경배하게 하라
9 박사들이 왕의 말을 듣고 갈새 동방에서 보던 그 별이 문득 앞서 인도하여 가다가 아기 있는 곳 위에 머물러 서 있는지라
10 그들이 별을 보고 매우 크게 기뻐하고 기뻐하더라
11 집에 들어가 아기와 그의 어머니 마리아가 함께 있는 것을 보고 엎드려 아기께 경배하고 보배합을 열어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리니라
12 그들은 꿈에 헤롯에게로 돌아가지 말라 지시하심을 받아 다른 길로 고국에 돌아가니라

 

<말씀>
사막 사람들에게 기본 상식은 밤하늘의 별로 길을잡는 것이다. 밝은 낮보다 어두운 밤에 더 길이 드러나는 것이다.
우리의 삶도 밤하늘이 아닐까. 어디로 갈 지 모르는 그곳에서 밤하늘의 별을 보며 길을 찾는 것 아닐까.
동방박사들도 밤하늘의 별을 보는 이방인이었다. 페르시아로 추정되는 동방은 멀어서 예수님과 관계가 없어 보이지만, 마태는 이들이 예수를 기다리고 경배했다는 것을 기록하고 있다.
요즘 우리는 그 메시야의 탄생을 어떻게 기억할까. 가족과 연인의 시기로 경배하지 않을까.
우리가 경배하는 그 자리에 서야하지 않을까.
동방박사는 어떻게 그 자리에 섰을까.

첫번째로 동방박사들은 구세주를 사모하며 기다린 사람이었다.
동방박사가 어떤 존재인지는 모르지만 고대 페르시아인들은 지혜자로 분류되었다. 이 박사 마고의 원어 마고스는 별을 보고 이야기하는 천문학자 점성술사라는 의미이다. 이들은 하늘을 보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찬란한 문화속에서 하늘을 보며 갈구한건 무엇일까.
아마 인간의 의미와 진정한 정의를 생각했을 것이다. 정의와 참 인생에 대한 갈급함이 있었을 것이다.
그들은 새 메시야가 유대 땅에 태어날 것을 알고 기다렸다. 이 땅에는 참된 것이 없기에 참된 구세주를 기다렸던 것이다. 그래서 그 메시야를 기다리는 간절함이 있던 것이다.
안나와 시몬도 성전에서 금식하며 메시야를 기다렸다. 동방박사들도 그렇게 어두운 사회에서 기다렸을 것이다.
로마니아 태생 엘리위젤의 소설인 밤에는 아우슈비츠에서 본 한 장면을 고백한다. 어린 소년이 교수형으로 죽어가는 그 상황, 몸이 가벼워 30분동안 발버둥치는 그 상황. 그 상황에 하나님은 어디에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그 절규 앞에, 마음 속 깊은 목소리가 들렸다. 하나님은 저 교수대에 있다고.
그렇게 절망이 깊어질 수록 하나님에 대한 갈망이 깊어졌다. 그 절망의 깊이로 인해 신앙의 깊은 여정으로 나간것이다. 결국 그는 1986년 절망 속에서 참된 희망을 이야기하는 사람으로 노벨평화상을 수상하였다.
우리의 구세주되긴 임마누엘 되신 하나님. 그 하나님을 노래한 것이다.
이 세상에 참정의 참 소망은 없다. 참된 선이 어딨을까. 선한 것이 어딨을까. 수없이 방황하다 그쳤기에 해답없는 것들. 그런 일 앞에 내 삶의 소망이 무엇일까.
그리스도인 젊은이로 산다는 것이 참 어렵고 힘든 일일테다.
우리의 허물과 죄를 짊어지시고 삶을 조명해줄 구세주가 필요하다. 그 희망을 포기할 것이 아니라 다시 갈구할 시기이다.
이 성탄절이 참된 구세주를 구한 시기이길 원한다. 낙심이 아니라 구세주를 바라보며 걸어가는 시기이길 원한다.

두 번째로 동방박사들은 메시야를 찾아갔기에 경배할 수 있었다. 그들은 페르시아출신이라는 설이 추정된다. 보통 낙타를 타고 두세달 와야 하는 길이라고 추정된다. 강도의 위협과 목마름 배고픔을 이겨내야 하는 시간이다.
그리고 성경에는 동방에서 그 별을 보았다고 나왔다. 우리는 흔히 계속 비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한번 보고 사라진 것을 기억하고 온 것이다. 영어로는 아예 과거형과 다시 나올때 과거 완료형으로 쓰고있다.
우리도 내 눈 앞에 확실한 증거다 보일 땐 열정적으로 나간다. 하지만 눈 앞에 별이 보이지 않을 땐, 낙심하고 이렇게까지 해야하나 라고 한다.
예수님의 탄생을 이야기할 때에 미가서 5장 2절을 이야기한다. 베들레헴이 가장 작지 않다고 한 그 예언. 그 예언에 따라 이곳에 메시야가 있다는 확실한 믿음이 그들을 달려오게 했다. 이 별은 그들의 믿음이 되었다. 그들의 소망이 되었다. 주의 말씀은 내 발의 등이고 내 길의 빛이 되었다는 그 고백처럼, 그들이 바라보게 되었다.
이 말씀에 따라 인생길을 걸어간 것이다. 
미국 감리교 윌리암 커싱 목사님은 말씀에 은사를 받은 사람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아내가 사망하고, 그로 인해 건강도 나빠지고, 결국 목소리도 잃어버렸다.
그 상황은 그를 인생에 쓸모없는 사람이라는 좌절과 절망이 되어버렸다.
그 와중에 하나님께 바친 몸이니 설교를 못하면 다른 곳에 써달라고 절규와 탄식을 하게 되었다.
그때 시편 121편 1절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꼬, 시 23편에 사망의 음침란 골짜길 다닐지라도 라는 말씀이 들어왔다. 남들에게 감동만 줘봤지 자신이 느껴본 적이 없었는데, 이 말씀이 자신에게 들어왔다. 주와 함께하는 그 고백, 그 다윗의 고백, 그 말씀이 절망에서 빠져나온 그 고백이 되었다. 여러 찬양을 보면서, 이 눈에 아무 증거 아니들려도 라는 찬양이 들어왔다고 한다. 
우리 앞에 확실한 별들이 사라졌나. 우리의 희망이 없어지고 어디로 갈지 알지 못하나.
우리의 인도하는 별이 말씀임을 생각해본적이 있나. 그 희망과 소망이 사라졌을 때, 그 어둠에서 빠져나오도록하는 하나님 생각이 느껴진적 있나.
나의 발에 나의 길에 등과 빛으로 다가오신 하나님을 느껴본적이 있나.
동방박사들처럼, 별이 사라져도 걸어가는 우리가 되자. 잠언 8장 17절처럼 나를 찾는자가 나를 구하는 자가 나를 만나리라 한 말씀처럼, 가장 어두운 바벨론 유수시기 하니님을 향해 한걸음씩 걸어간 사람들처럼, 우리도 걸어갈 수 있지 않을까.
어둠 속에 살아가는 그 말씀의 빛을 따라가자. 동방박사들이 메시야를 찾은 것처럼 말씀을 찾고, 그말씀이 찾아오도록 해보자. 말씀이 임하여 어둠이 없고 빛 가운데로 살아가보자.
우리의 삶이 어두워도 낙담하지 말고 말씀으로 일어나보자. 낙담의 자리에서 일어나 걸어가보자.

세 번째로 동방박사들이 메시야를 만나고 경배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메시야를 경배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헤롯 왕 앞에서 번역상 강조가 덜 된 부분이 있는데, 원어에는 메시야를 경배한다는 의미가 분명히 드러나 있다. 이집트에서 신에게 이마를 땅에 대며 경배하는 것과 같은 의미이다.
황금은 온전한 왕에게 드리는 공물이고 유향은 신께 드리는 것이고 몰약은 시신용 방부제로 십자가의 몰락과 죽음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우리가 진정 주님을 경배하는게 무엇일까. 왕되신 그리스도를 고백하는 마음이 우리 마음속에 있나?
왕을 통치하시고 합당한 것을 주신다는 고백, 그 고백이 우리 안에 있나?
다윗은 삶에서 죽음을 친숙하게 접한 사람이다. 그런데 그 죽음 속에서 여호와는 나의 요새 산성이시니 누구를 두려워하냐고 하였다. 왕되신 주님을 섬기는 그 고백. 시대나 메스컴이나 문화나 내 필요를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주권을 드리는 그 삶인 것이다.
인생은 짐을 지고 가는 것이다. 젊을 때는 모르지만 하루하루 짐이 많아져간다.
이 인생의 짐의 무게를 이겨내기 어렵다. 죄와 허물을 이겨내기 어려운 것이 우리의 무게이다.
나의 참 제사장 되신 주님, 나와 사람과 하나님 사이에서 친히 어린양의 제사를 지내주신 주님, 그 주님에 대한 고백이 우리 삶에 있는지 고백해보자.
우리는 나름의 기준이 있다. 예배가 좋다 찬양이 좋다 등. 이 기준은 우리의 지식과 학습된 삶의 틀 안에서 나오는 것이다.
그게 온전한 관점이라고 생각하나.
우리 사회의 많은 갈등처럼 우리도 그렇게 치이며 살지 않는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한다면 많은 사람이 따라가도 걷지 않는 것이지 않는 것 아닐까.
걸어서는 안될 길에 걸어가지 않는 그 고백이 우리 안에 있는 것일까. 우리의 사명 있다면 어두운 시대에 이 시대를 바꿔 나가고 좌절한 사람들에게 주님을 맡기는 것이 아닐까.
메스컴과 여러 방송이 말하는게 맞을까. 상담과 심리학을 공부한 사람으로서 많은 사람이 상처의 기준을 갖고 있다. 예를 들어 엄마처럼 살지 않을거야 라는 것이다.
미국에서 전쟁때 방탄조끼가 처음 나오자 오히려 죽는 사람이 많다고 한다. 그것이 알고 보니 다 얼굴에 총맞은 사람이란 것이다. 이렇게 안심할 방법을 찾아도 더 큰 어려움이 있다.
우리도 시대를 원망하고 사람들을 원망해더 더 큰 어려움이 있을 뿐이다. 성탄절을 맞아 다시 한번 회복해보자. 
동방박사들 처럼 이 시대에 어떤것을 드릴지 생각해보자. 성경은 나 자신을 산 제물로 드리라고 한다. 나는 죽고 그리스도는 사는 그 삶. 그 삶이 그리스도의 삶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일어서서 사는 삶. 그 고난의 삶을 이겨나가는 그 삶. 어두운 시대 밤하늘의 별을 보며 설계했던 그 사람들처럼 하나님의 꿈을 꾸길 원한다.
며칠전 성탄절 선물 편지를 받았다. 24년 7월 암을 선고받고 9월에 항암시작한 이야기였다. 그 무서운 상황에서 기도해준 동안의 성도들은 어느 부서 하나 할 것 없이 다같이 중보해주었다. 나의 필요를 알고 쥐어준 것처럼 세밀하고 정확하게 은혜가 임했다. 집밥부터 운동보조와 떡과 밥과 방문과 가족 도움 등 수많은 도움들이 많았다. 덕분에 성전에서 성탄예배를 드리게 되었다.
이 편지의 주인공처럼 평범한 예배가 누구에게는 특별한 예배일 수 있다.
우리 모두에게 이런 사랑이 있다면 이토록 힘들게 살진 않았을것이다. 이 공동체의 사랑이 있었다면 삶을 스스로 마감한 지체는 없었지 않았을까.
힘든 지체에게 손을 내미는 사람이 있었다면 어땠을까.
사랑의 쌀 나눔 관련해 인터뷰가 왔을 때, 왜 이 일을 계속 하냐고 했다. 그때 섬기는 기쁨이 더 크다고 이야기하였다.
교회가 셀 중심으로 가야겠다는 것이 삼사년 되었다. 서로 그렇게 붙드는 것이 그 힘이 되지 않겠나.
미국 세콰이어 공원이 있다. 이 나무는 태평양 모진 바람과 불에도 무너지지 않았다. 이 세콰이어는 높은 나무보다 옆으로 퍼진 뿌리가 더 길다고 한다. 누군가 함께 지탱해 줄때, 그들은 쓰러지지 않는 것이다. 
동방박사처럼 우리도 될 수 없을까. 우리도 주님을 찬양하고 경배할 수 없을까. 웃음과 씁슬함으로 날려버릴 날이 오늘인가.
2024년 성탄절, 동방박사처럼 주님을 경배하길 소망한다. 주님 앞에 그 삶을 올려드리길 원한다. 시대를 이끌어가는 우리가 되길 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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