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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안교회 2024 심령부흥회 말씀 기록_240825

설교말씀 모아/Dongan 주일 및 기타예배

by Choorysostom 2024. 8. 28. 03:36

본문

240825 심력부흥회
김운성 목사님(영락교회 위임목사)
터를 견고하게! - 부흥
하박국 3. 2.

 

<요약>
1. 흔들리는 바다 위나 지진나는 땅은 위험하듯, 사람에겐 단단한 마음의 터가 중요하다. 겉뿐만 아니라 속도 단단해야한다. 속이 비면 싱크홀같이 무너질수도 있다.
2. 하박국을 보면, 1장의 하박국은 무너진 싱크홀처럼 울부짖고 원망하며 하나님께 답을 구한다. 하지만 2장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3장 18절처럼 무화과나무가 말라도 하나님을 찬양한다.
3. 그것은 2장 16절에 환란중에도 의인은 '그의(하나님의)'믿음으로 살리라 라고 했기 때문이다. 여기서 그는 하나님을 의미하는 것으로, 인간은 못나고 배신하고 하더라도 하나님은 포기하지 않으신다는 의미이다.
4. 또한 이 말씀을 듣고 하박국은 3장 2절에 부흥을 소망하게 되는데, 이 부흥은 '살아나다'의 의미에 가깝다. 마치 2장 16절의 의인이 믿음으로 살리라 할때 처럼.
5. 우리 한국교회는 자꾸 여호와보다 여호와의 손에 들린 선물을 바라본다. 우리의 인생이 바람빠진 풍선처럼 아무것도 없어도, 하나님이 우리를 먼저 사랑하셔서, 우리가 부흥(살아남)의 소망을 가질 수 있다. 사람많아지고 돈 많아지는 그런 부흥이 아닌, 주님께서 우리를 살리실 부흥을 소망하자.

 

<본문>

2   여호와여 내가 주께 대한 소문을 듣고 놀랐나이다 여호와여 주는 주의 일을 이 수년 내에 부흥하게 하옵소서 이 수년 내에 나타내시옵소서 진노 중에라도 긍휼을 잊지 마옵소서

 

<설교>
원래 목사님 창원에 계실때부터 알아 목회하시던 교회에 세네번 가면서 말씀해주시고 했었다. 기쁨과 감사한 마음으로 오게 되었다.
요일 1. 3.에 보면 성도의 교제에 관한 말씀이 있다. 우리의 사귐은 하나님과 함께하는 것이라고 한다. 우리는 한번도 못봤지만 오래 본것으로 느껴지는 것은 서로 주님 안에 한 형제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천국갔을때에도 주 안에서 하나기에 어느 교회 출신인지등은 중요하지 않다.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으로 기록된 성경을 성령으로 깨닫길.

나는 서울에서 태어나서 서울서만 살았다. 그리고 주님 보내시는 곳으로 가겠다 했더니, 처음엔 서울에 있는 교회에 불르셨지만 영도라는 부산 끝 섬에서 부른 경우가 있었다. 부교역자도 아니고 담임목사로, 32살에 불렀는데, 주님 보내시는 곳으로 가겠다는 말을 5분만에 뒤집을 정도로 당황하며 만류하였다.
그래도 여차저차 32살에 부임하여, 서울 올때까지 27년 12개월을 그 교회에 있었다. 그러다 지금 영락교회로 왔는데, 생각해보니 나와 동생이 영락교회에서 태어났었다.

그 교회는 바다에 보이지만 바다가 익숙하진 않았다. 대마도가 가까워 몇번 갔다오고 했다. 그러던 한번은 배멀미가 심하고 다같이 힘들어했다. 그렇게 육지를 바라보며 발을 내딛는 순간, 물은 넘실대지만 땅은 견고하다 생각하며 안심하게 되었다.
그런데 땅이라고 안전한건 아니었다. 어느날 2부 헌금시간에 지진이 나서, 입으로는 기도를 하지만 눈으로는 성도들의 반응을 찾았다. 특히 가운데 기둥이 없는 예배당 특성상 더 무서웠었다.
이렇게 땅도 견고하지 않다. 요즘 일본도 대지진을 주의하고 있고, 고든 맥도날드 목사님이 쓰신 내면세계의 질서와 영적성장 책을 보면 싱크홀이 나온다. 지하수의 공동화가 일어났지만 눈에 안보이는 싱크홀의 이야기를 읽으며, 땅속에 해당하는 것이 우리의 영혼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런 웅덩이처럼 우리의 영혼도 가라앉아있으면, 언제 우리의 삶도 꺼질지 모르는 것이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데 우리가 두 발을 딛는 터가 있다. 우리가 몇십년 하나님을 믿고 살지만, 과연 그 신앙의 터가 어떤 것을 얹어놔도 꺼져내려가지 않을 만큼 견고한가를 보기 위해 이런 주제를 정한 것이다.
우리의 터를 다지는 것을 위해 3가지 주제인 부흥 성결 사랑을 선정하게 되었다.

오늘의 주제를 풀어서 말하면
몇십년 하나님을 믿었지만 하나님을 경외하는게 맞는가? 라는 것이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으로 생각했지만 사실 내 마음속에서만 착각하는것 아닐까.
아빠가 집에 도착하면 아이가 달려나간다. 아빠가 좋아서 라고 하면 좋겠지만 아빠 손에 달린 간식을 보고 뛰어나가는 것이다. 이게 씁슬해할게 아니라, 아직 철이 없고 어려서 그런 것이다.
하나님을 경외해야한다. 하나님의 손에 들린 것을 경외하는게 아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풀어주시는 것이 꽃이는게 많은게 여태까지 한국교회의 모습이었다.
우리나라의 말에는 주세요로 끝나는 기도가 많다. 주시면 받겠다는 기도가 많다. 호주머니가 차는 것을 원하는게 많다. 
아이가 한두살씩 클수록, 내펜 내 책상처럼 내꺼가 많아진다. 그리고 서른살쯤 되고 하면 점차 내꺼가 풍선처럼 많아진다. 인생이 0으로부터 시작해서 매우 부풀어 오른 것이다. 그러면 사람들이 저 사람 성공했다고 말하곤 한다.
하지만 어렸을 때 친구들을 다시 만나면, 더 큰 사람들을 보며, 나는 가진게 없다고 슬퍼하곤 한다.
우리가 티비를 보면 0으로 태어나 성장하는 스토리들을 많이 본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더 많이 더 쌓길 원하는 자본주의의 스토리. 그게 그대로 하나님께 옮겨지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이 채워줄 것인가에 대한 관심이 많다. 하나님이 복을 주셨다고 하거나, 그게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척도로 재기도 한다. 그게 옳을까? 심지어 목사들도 옆에서 군불을 많이 때버렸다.
그러다 보니 많이 쌓고 높이 쌓은 것 같지만, 어느새 그 사람의 속에 구멍이 뚫려있다.
목회자들도 그렇다. 목회성공이란 역설적인 말로 출석수나 유명세를 통해 목회성공을 얘기한다. 이런 가치관으로 얘기하니 교회도 자본주의에 휩쓸리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목회성공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게 된다.
그렇게 순식간에 성도가 늘어나 겉으로는 성공한 목사가, 그 안에 깊은 공허가 있어, 결국 망가지거나 못할일을 해서 무너지는 모습을 보곤 한다.
이렇게 많이 성공한 인생도, 덧셈이 있으면 뺄셈이 있듯, 자신의 고무풍선에 바람이 빠질 때가 있다. 그리고 그 때는 어느 인생이든 매우 힘들고 어렵다.
젊었을 때는 지식의 차이가 큰것 같지만, 80넘으면 평준화된다. 대학나온 사람도 치매 잘걸린다. 사목하는 교회에도 미국에서 박사학위 2개을 받았지만 치매에 걸려 요양병원에 온 사람도 있고, 기골도 장대하고 공부도 많이 하고 소문난 부자인 사람이 요양병원에 누워있는 경우도 있다. 그 두번째분 앞에 서서 기도를 해드렸는데, 돌아보니 남은 것이라곤 곽티슈 2통과 플라스틱 물통, 기저귀와 베지밀 반박스 뿐이엇다.
옷조차도 돌고 도는 옷을 입고있는 것. 그렇게 인생의 뺄셈을 보았다.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고 하나님의 손에 들린 곳을 보는것. 그게 아니길 바란다.

하박국 선지자는 남왕국 유다가 몰락할 무렵에 나온 선지자다. 하박국은 하나님께 화가 많이 나있다. 1장 2절부터 폭발하는데, 부르짖어도 듣지 않는게 언제까지냐고 따진다. 그리고 강포로 외쳐도 듣지않고 부패와 불안함이 펼쳐지는 사회가 있다고 한다. 정의도 없고 악인이 의인을 에워싸는 상황. 그리고 그 와중에 반응없는 하나님. 이런 분노가 폭발하고 있다.
그렇게 폭발하는 이유는 그것 때문에 인생이 고통받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에게 해코지당하고 정의가 어딨는지 모르겠는 사회. 그 사회 때문에 고통받아 하나님께 따지는 것이다.
그러자 그 상황을 아시는 하나님이 답을 주신다. 1장 6절에 그 소리와 타락을 알고있으니 내가 남왕국 유다를 갈대아 사람(바벨론)이라는 채찍으로 세게 때리겠다는 것읗 알려주셨다.
우리는 이것을 보면 하박국이 어떤 상황인지를 알 수 있다. 남왕국만 남고, 요시야 왕때 잠시 잘 돌아가려 하는데, 이 요시야가 애굽에 죽고 나니 국운이 기울어갔다. 애굽과 바빌론의 영향력 아래 있다 나라가 사라진다.
1차 침공때 다니엘이 끌려가고, 2차침공때 여호야긴을 끌고가고 시드기야를 왕으로 앉혀놨다.
그러다 시드기야가 애굽에 자꾸 붙으려 하자, 3차 침공 이후에 멸망한다.
그렇다면 이 하박국은 바벨론의 말발굽이 가까워 올 때 이 것을 선포한 것이다.
우리나라의 대한제국 시기 고통을 겪은 것처럼 하박국도 그런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하나님의 채찍과 관련한 말씀을 보면, 답답할수도 있다. 바벨론의 느부갓네살은 역사적으로 명군이고, 국가를 경영하고 인재를 알아보는 탁월한 군주였다. 이 느부갓네살은 이집트마저 수하에 넣을뻔한 왕이었다.
하박국은 바빌론이 채찍이란걸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우리는 하나님을 부르는 사람인데 우리보다 더 악한 바벨론을 데려다가 우리를 칠 수 있냐며 따졌다.
그게 1. 17에 잘 나와있다. 마치 그물을 계속 던져놓고서도 다시 또 던지는 욕심많은 어부처럼 나쁜 바빌론에게 우리를 맡긴게 맞냐고 따졌다.
2장 2절에 하박국은 하나님이 뭐라 할건지 기다려 본다고 했다. 그러자 하나님의 말씀이 임했다. 달리면서도 읽을만큼 명백히 새기라고 한다. 더디더라도 반드시 이루어질테니 응하라고 한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신다. 그(바빌론)의 말은 정직하지 못하나,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우리의 주제는 부흥이라 하지만, 우리는 하나님을 따르나 다른걸 따르나 라고 생각할 수 있다. 3장 2절에 수년 내에 부흥하게 하라는 말씀이 있어, 많은 목사들이 교회 표어로 삼곤 한다. 많은 목사들은 숫자가 늘어난 곳을 생각한다. 하지만 세상에서 유일하게 새가족이 계속 오는 부흥하는 숫자을 지닌 곳은 공동묘지이듯, 부흥은 숫자와 관련된 곳이 아니다. 이 본문의 부흥하다 라는 동사는 하야 하는 동사호 살아 일어나다 라는 의미를 같이 지칭한다. 백골들이 살아 일어나다 할 때 그 것을 뜻하는 것이다.
2장 4절의 의인이 그의 믿음으로 살리라에서 3장 6절까지, 이 살아남의 의미로 연결되는 것이다.

여기서 그의 믿음은 보통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생각하겠지만, 각주를 보면 그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믿음을 가리킨다고 한다. 그렇다면 이 해석은 의인은 하나님의 믿음 덕분에 산다고 하는 것이다. 
이 믿음은 에무나 라는 것으로, 하나님이 가지신 변치 않는 신실함을 이야기한다.
그래서 하나님은 시내산에서 약속하셨다. 이스라엘 백성은 헌신짝처럼 버린 약속이지만, 하나님이 그 약속을 지켰기 때문에 이스라엘 사람들이 살아 있는 것이었다.
우리가 먼저 믿은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우리를 믿은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였기에 우리가 사는 것이다. 의인은 그 신실함으로 산다. 너가 나를 믿기 전에 너가 나를 믿은 그 신실함. 그것으로 사는 것이다.
풍선이 부푸는 것처럼 성공하면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바라볼 때 사는 것이다.
부흥은 하나님으로 인해 내 심령 안에서 하나님을 깨달을 때 부흥이 일어나는 것이다. 그렇게 하나님을 깨닫게 될 때 내가 살아서 일어나는 것이다.

우리가 그렇게 뉴스에 집착할 필요가 없다. 여러 신문들을 돌아 간다고 우리가 잘 사는게 아니다. 괜히 머리만 빠지는 짓 하지 말고, 하나님을 믿음으로 살고 그분이 우리를 붙드심으로 살길 원해야 한다.

하박국 3. 16. 을 보자. 환란날이 오고있음을 들어 창자가 흔들리는 시기. 그 목소리로 입술이 떨리는 것. 내 몸은 내 처소에서 떨린다. 그렇게 악화되고 무서워지는 상황. 무화과나무가 떨어지고 아무것도 없는 상황.
만약 1장의 하박국이라면, 이쯤에서 폭발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 한다. 그 마음 속에 기쁨이 넘치는 것이다.
분노에 찼던 1~2장의 하박국. 백골과도 같던 그 마음을 가진 하박국이, 그때 '부흥'하였기 때문에 다시 기뻐한 것이다. 환경은 그대로다. 아무것도 바뀌지 않았다. 바뀐 것은 하나님이 함께하심을 깨달은 것 뿐.
여기서 구원의 하나님이라고 하는 구원은 뭘까? 강포와 불의가 없어진건 아니다. 바벨론은 그대로 오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구원은 하나님 안에서 살아계시는 그 구원이었다. 전쟁과 폭동 사이에서도, 하나님께 살고 죽음을 다 맡겨 여기서나 어디서나 하나님과 함께 하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것. 풍선은 없고 모든 것이 욕먹고 하더라도 기쁜것. 그것이 하박국의 부흥이었다.
그러면서 19절에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라고 한다. 다윗이 자주 말한 이 말, 그 말이 구원으로 힘이 되어주신 그 말이다.
그 구원을 통해 아무리 북한이 난리치고 사회가 망가져도, 하나님을 경외하길 바란다. 그 어떤 말 속에도 하나님이 힘되심을 경외하자.
우리가 내꺼풍선이 다 빠져 마지막 호흡한 순간에도, 하나님이 남아있길 소망하자. 이 땅의 마지막 걸음이 천국의 첫 걸음이 되길 소망하자. 진짜 하나님만 바라보는 것이 진정한 부흥임을 소망하며 바라보자.

어느날 결혼식하고 집으로 심방간 적이 있다. 그때 배식받는 성도가 요구르트가 떨어졌다고 엄청 화내고 성질낸적이 있다. 앞서 은혜롭게 하나님이 전부라고 찬양했지만, 요구르트 하나에 한달간 교회를 안나오게 된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의 전부임을 믿고 승리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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