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0826 심령부흥회
김운성 목사님(영락교회 위임목사)
터를 견고하게! - 성결
이사야 6. 1-8
<요약>
1. 넓은 잎사귀의 나무보다 뿌리 깊은 나무가 광풍에도 넘어지지 않는다. 우리도 마음의 뿌리를 그리스도에게 내리자.
2. 예수의 복음이 값없는 이유는 값싸서가 아니라 가치를 못매길만큼 비싸서이다. 우리의 마음을 정결하게 하고 깊은 뿌리를 내려, 값싼 복음이 아닌 비싼 복음을 만들자.
3. 그 뿌리의 큰 줄기는 내가 여호와를 경외하는지 이다. 여호와를 경외함에 대한 증거는 멋진 모습은 물론 봉사나 섬김, 헌신 등이 아니다. 눈에 보인 숫자, 성장 등은 값싼 복음을 만들 뿐이다.
4. 경외함의 증거는 하나님 앞에서 정말 더러운 죄인이지만 주께서 의롭게 하심을 인정하고, 양심이란 도구로 나 자신을 돌아보는 것이다.
5. 그렇게 거룩해지자. 멋진 섬김과 헌신이 아닌, 내 입술을 돌아보고, 작은 죄에도 민감해지자. 그렇게 하나님 앞에서 정결하고 사람들 앞에서 중보하기에 합당한 거룩을 이뤄나가자.
<본문>
1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 내가 본즉 주께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셨는데 그의 옷자락은 성전에 가득하였고
2 스랍들이 모시고 섰는데 각기 여섯 날개가 있어 그 둘로는 자기의 얼굴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자기의 발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날며
3 서로 불러 이르되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의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하더라
4 이같이 화답하는 자의 소리로 말미암아 문지방의 터가 요동하며 성전에 연기가 충만한지라
5 그 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나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주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하였더라
6 그 때에 그 스랍 중의 하나가 부젓가락으로 제단에서 집은 바 핀 숯을 손에 가지고 내게로 날아와서
7 그것을 내 입술에 대며 이르되 보라 이것이 네 입에 닿았으니 네 악이 제하여졌고 네 죄가 사하여졌느니라 하더라
8 내가 또 주의 목소리를 들으니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하시니 그 때에 내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하였더니
<설교>
월요일 하루 살고 나오신 여러분께 하나님의 은헤가 함께하길.
산에 나무들이 경쟁하듯 자라는데, 그중 한 나무가 크고 멋지게 자라서 나무들의 왕이 되었다고 한다. 다른 나무들은 그 나무를 보며 부러워했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날, 밤새 광풍이 불고, 다음날 아침 그 나무가 뿌리채 뽑혀 쓰러져 있었다고 한다.
그 나무는 처량한 모습으로 옆의 작은 나무에게 광풍을 견딘 것을 물어보았다. 그러자 그 나무는 큰 나무가 잎사귀와 가지를 넗힐 때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고 한다.
우리도 우리가 뿌리내릴 터인 우리 주 예수님께 깊이 뿌리내리자. 흔들릴지언정 뽑히지 않게 살아보자.
목사로 살면서, 예수님을 믿을 때 힘들게 믿고 고민하며 믿어야 한다는 생각을 한다. 힘들게 믿는다는 것은 복음을 싸구려로 만들면 안된다는 것이다. 길거리의 짝퉁 장식품처럼 가치없는 것이 아니고, 값으로 환산할 수 없는 최고의 선물이 복음이다. 그게 거저 받아서 싼줄 아는데, 그게 값이 싸서가 아니라 인간이 평가할 수 없을 만큼이기 때문에 주님께서 우리에게 거저 주신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이 어떤 고초를 겪고 어떻게 생명의 부활이 이뤄졌는지 안다면 복음을 싸구려로 매길 수 없다.
신앙엔 가벼운 신앙과 무거운 신앙이 있다. 가벼운 신앙은 전도지에 하나님 사랑하시니 믿으면 구원받는다는 말만 써두오 다른 사람들이 쉽게 생각하는 것이다.
우리가 이런 가벼운 복음을 하지 않기 위해 우리의 뿌리를 깊이 내려야 한다.
우리나라에 복음이 전파된 초창기에는 선교사님들이 돌아가며 골방에서 준비했다고 한다. 초기에는 밭일하다가 허겁지겁 들어와 설교하기도 하는데, 시편 23편의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를 여호와는 나의 목 자르시니 라고 하여 하나님께 목을 드리자는 말을 하곤 했다고 한다.
그렇게 뭔가 이상하긴 하지만 순박하게 목도 드리는 마음을 가진 사람들. 요즘에 정갈한 선교와 시원한 예배당에서 내가 신앙생활하는 사람은, 훨씬 더 많은 것은 받았지만 말씀에 대한 순종은 없는 사람인 경우가 많다.
주님께서 마지막 때에 참 믿음 있는 자가 있겠느냐 라는 말씀이 가끔 생각난다. 그래서 오늘 3일간 터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려고 한 것이다.
어제 말씀은 아버지를 사랑하는지 아버지의 손에 든 것을 사랑하는지에 대한 것이라고 했다. 오늘은 우리의 터를 점검하는 차원에서 성결을 이야기해보려고 한다.
내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라는 것에 대한 증거가 무엇일까?
최근에 은퇴장로님의 장례가 있었다. 장례식에 순서지도 있고, 유족에 대한 정보등도 써있다. 고인에 대한 약력도 써있다. 신앙이력, 봉사이력도 있다. 그런데 그걸 보며 그 정보들이 그분을 설명할 정보로 적합한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좋은 일 한거, 멋지게 산거로 환영하진 않을 것이다. 또한 이것은 내가 누구인지를 설명하기에도 쉽지 않다.
보통 어떤 사람을 소개한다면, 하나님 앞에 제대로 믿어볼라고 많이 했던 사람이라고 소개하는 것이 그분에게 가장 좋은 것일 것이다.
부정한 세상 앞에 조금 더 살아볼라고 노력한 모습들. 그런게 그분이 어떤분인지 설명할 수 있을것이다.
지금생각해보면 약력이력이 가장 길었던 사람은 백남준교수님이다. 하지만 이런 약력과 이력에 대한 설명은 여기 없었다. 그것은 하나님이 알고 있기에, 여기 적혀진 것을 보지 않으시고 남들이 보지 않는 것을 보실 것이다.
목사님을 모시는 것을 청빙이라고 하는데, 요즘 청빙이 거의 없다. 그냥 공고가 나고 지원하는게 당연하다. 그렇게 성도들이 지원자 목사들의 설교를 듣고 점수를 매기는 것이다.
만약 엘리야 시대, 왕이 선지자를 선택했다면? 아마 엘리야는 선지자조차 되지 못했을 것이다.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선지자를 통해 전헤애 힐텐데, 왕이 선지자를 평가하는 것 처럼 성도들이 목사 점수를 매기는 것이다.
좋은 목사는 성도들의 입맛에 맞는 목사가 아니라, 성도들을 바로세우는 목사다. 편하게만 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원하시는 신앙이 되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하고 있다.
그렇게 목사 지원서에 운전면허 1종, 웃음코칭 자격증 등이 들어가는 동안, 진짜 중요한게 없었다. 눈물흘리고 사랑했던 경험, 그 경험이 중요한데 이 ㅈ원서엔 없다.
정말 여호와를 경외한다면 어떤것으로 경외해야 할까?
신앙 연수 등은 중요하지 않다. 8절의 말씀에 이사야선지자의 소명에 관한 말씀이 있다.
많은 목회자들과 성도들이 이런 의식을 갖고 있다. 하나님이 날 보내신 것이니 충성해야 한다고 한다. 그렇게 나중에 하나님을 경외했던 증거를 교회학교나 찬양대 등 섬기는 것으로 이야기한다. 하지만 그것으론 중명이 되지 않는다. 그것에는 한계와 위험이 있다.
마 7. 22~23. 그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의 이름으로 많은 일들을 행하지 않았냐 하니 나는 모르다 라고 한다. 이 말씀에는 아멘이라고 하기도 많이들 한다. 이 말씀처럼 우리가 열심히 충성한 것을 주님께서 우리를 모른다 할 수도 있다. 그런게 증거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더 중요한 근거는 무엇일까?
이사야서를 다시 봐보자. 6장 1절과 2절은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보는 것이다. 하나님의 어마어마한 모습 앞에 서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앞에 설 때 인간이 느끼는 첫번째 느낌은 나는 더럽구나이다. 비슷한 색깔기리는 더러운지 몰라도 정결하신 하나님 앞에서는 더러운 것이다. 그래서 입술이 부정하여 화로다 라는 것이다.
그는 자신이 죄인이란 것을 알았다. 이렇게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더러운 존재임을 알고 떠는 사람, 그 앞에서 충격먹는 사람이 올바른 사람이다. 이사야도 자랑할 건 많았을 것이다. 제사도 많이 드리고 자주 왔다갔다 한 것이 많을 것이다. 하지만 이사야는 그런 것을 드러내지 않는다.
요즘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 많다. 온갖 협작과 거짓과 위선과 부패 등이 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면 있을 수 없는 일인데, 우리 한국교회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을 상실하여 새빨간 거짓말을 하기도 한다. 예배때 불량한 자세를 갖추기도 하고, 팔짱끼고 평가나 하고 있을 수도 있다. 주님의 보혈이 없어도 내가 봉사하면 된다고 한다.
이사야도 이때 하나님 앞에서 두려운 시간을 맞이하여 두려워 떨었다. 입이 부정하다며 두려워 떨었다.
이때 천사가 날라와 입에 숯불을 대주었다. 그렇게 악이 제하여지고 죄가 사하여 졌다. 화를 입어야 할 사람이 구원박고 망해야할 사람이 살아난 것이다.
이렇게 의롭다고 인정받는 것. 내가 한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해주시는 인정. 이렇게 봉사와 섬김이 아니라 씻김받는 것으로 하나님의 천국산성 안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어떤게 과제일까? 성결한 사역이중요하다.
구약 신약에는 거룩하라는 말씀이 나온다. 성경 레위기에서 그렇게 거룩하란 말이 많이 나온다. 그런데 우리는 스스로 거룩하게 할 수없고,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인도당해야 한다.
요즘 한국교회가 아픈 이유는 충성하는 사람들이 거룩하지 않아서이다. 많이 판단하고 그런 모습이 거룩하지 않아서이다.
여러 교회를 돌아다니며, 많은 큰교회 목회자와 장로님들을 만나게 된다. 그러다 거룩하지 못한 모습을 들으면 참 그렇구나 하게 된다.
그리고 어느날 농촌교회등에 가면 시설은 열악해도 하나님께 바로 있다는 것을 느낀다.
우리도 주님과 함께하면 팔짝팔짝 느껴지는 마음을 갖길 원한다. 다른 것보다 주님의 보혈로 성결하게 씻기고 그대로 있어야 한다. 다른 것보다 신앙의 양심이 좋아야 한다.
최근에 청년이 보낸 메일에 놀랐던 목사님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청년의 메일내용은 요새 너무 괴롭다, 나같이 더러운 사람이 있을까 한다. 청년부 임원도 했지만, 나같은 죄인이 구원 받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떤 자매를 보고 반했고, 그사람만 생각하면 모든게 뒤죽박죽이 되었다. 고백하려 하지만 막상 앞에 서면 바보가 되기에 아무것도 못했다. 그러던 어느 날, 밤에 잠을 자며 꿈을 꿨는데 그곳에서 강제로 그녀를 범하는 꿈을 꾸었다. 그걸 반복적으로 꾸었다. 내가 얼마나 더러우면 꿈속에서 그럴까, 내가 구원받은 하나님의 아들일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메일에 목사님이 뭐라 답했을가. 그래 자네 더럽네 회개하게 라고 할라나. 나는 메일 안받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해야하나. 보통 꾸지람부터 들을텐데.
그런데 오히려 그 목사님은 칭찬을 했다고 한다. 그 청년이 영광이라고 한다. 그 사람과 나중에 줄을 놓으려면 연락하라고도 했다.
그런데 왜 그렇게 말했냐면, 온갖 더러운 일이 대낮에 일어나는 세상이다. 내가 그런적 없다고 핑계 거짓이 판치는 양심에 화인맞은 사람들이 널렸다. 그러나 이 사람은 이 양심에 슬퍼하는 사람은 양심이 살아있는 것이다. 그 모습을 끝까지 잃지말고 지키길 바란다고 한다.
그 목사님의 답을 듣고 부끄러운 줄 모르는 양심이 죽은 자가 많은 이 세상에서, 꿈인데도 괴뤄워하는 깨끗한 영혼의 청년을 보며 감동했다.
우리는 말씀대로 살지 못하는 것을 괴로워해야 한다.
단순히 성경퀴즈등을 잘 하는 것이 아니라, 그 말씀대로 살지 못하는 자신에 대한 영적 채직이 중요하다.
그렇게 통회의 눈물이 흐르고 십자가 앞에 엎드리는게 중요하다.
그런데 이건 이력서에도 고인의 약력에도 나오지 않는다. 하지만 이게 정말 열심히 산 증거이다.
거룩한 삶을 살면 거룩하게 될 것이다.
이사야 3절에 거룩해야 한다는 말은 하나님이 거룩하시니 우리도 거룩해야 한다는 것이다.
에베소서 5장 26~27절을 읽어보자. 이 말씀이 결혼식때 많이 쓰이긴 한다. 겉으로 보기엔 아내와 남편얘기이기때문이다. 하지만 이것은 주님과 교회의 관계이기도 하다. 주님은 우리가 거룩하길 원하고, 교회가 거룩하고 흠이 없을 때에 영광스러운 교회가 될 수 있는 것이다.
또 우리가 거룩해야 할 이유는 여호수아 3장 5절에서 알 수 있다. 여호수아가 요단강 건너기 전, 기이한 일들을 만드실 테니 먼저 성결하게 하라 했다. 가나안이 보이지만 들어가지 못하는 이 시기. 여호와께서 기이한 일을 보여줄 테니 성결하라 하셨다. 하나님의 기적을 보는 것은 성결하라 딱 하나이다. 우리 자신을 냉정하게 들여다보자. 내 속에 쓰레기가 많은지 볼 수 있는 눈이 필요하다. 우리 안에는 많은 죄가 있을 수 있다. 간음은 안했어도 다른 죄는 할 수도 있고, 물질로 나쁜 짓을 할수도 있는 것이다. 매주 강단에 설 때마다 내가 자격이 있나, 너는? 이라고 물어볼 정도로 항상 부담스럽다. 그정도로 인간은 죄인인 것이다.
은퇴목사님과 얘기하는 중, 거룩한 목사가 되어야겠다는 말을 들었다. 그 이유를 물어보자, 은퇴가 얼마 안남았으니 뭘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그러자 참 뭐 한게 없다 했을 때, 하나님 앞에 갔을 때 적어도 수치는 당하지 말아야지 라는 생각이 들어 깨끗하게 살아야겠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또한 내가 성도들을 위해 기도하는데, 내가 불결하면 성도들을 어떻게 중보하냐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누구에 대해서든 거룩한 사람이 되도록 노력해야 하겠다.
특히 이사야처럼 입술에 대해 정결하도록 하나님 앞에 기도해야 한다. 우리 힘으론 안되니, 우리를 도우시는 성령님께서 우리의 욕심과 교만을 부술 때에 가능한 것이다.
날마다 하나님의 보좌 앞에 나가서 살자. 십자가 붙들고 하나님을 바라보자. 대단하고 충성된 일을 못해도, 내 뜻대로 살려고 한 사람으로 예수님이 받아주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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