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0830 금요 심야 중보기도회
손경숙 목사님 청년10부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
빌립보서 2. 6~11
<요약>
항상 높아지려 노력하는 사람의 본능과 다르게, 자기를 비워 철저히 낮아지신 예수님. 그 예수님처럼 나의 욕심을 비우고 주님을 채워, 깊이를 높이로 만들어가자.
<본문>
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9.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10.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11.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설교>
오늘은 오예 하는 하루입니다. 오예로 인사하겠습니다.
오늘 말씀은 다들 알듯이 사도바울의 옥중 서신이다. 디도를 통해 받은 편지와 헌금에 대한 감사의 내용과, 빌립보 교회 내의 분쟁에 대해서 하나됨을 권면한다.
유오디야와 순두개 사이에 갈등이 있는 것 같은데 바울은 누구의 편도 들지 않는다.
바울은 그냥 한마음이 될 것을 권면한다. 그렇게 그리스도의 사랑과 겸손을 본받으라 한다.
2장 5절에 있는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만을 이야기하며 그 마음과 태도를 본받으라 한다.
그러고 예수님의 삶의 자세를 이야기한다.
그 예수님의 삶의 자세는 비천한 종으로 오셔서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을 의미한 것이다.
우리는 빌립보서 2장 7절의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진 것을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다.
우리는 다 높은 주님이 우리를 끌어올려주시기를 바랄 것이다.
우리는 항상 개천에서 용나길 원한다. 물론 요즘엔 그런것이 더 어렵지만 우리 안의 깊은 곳에 그 마음이 남아있다.
나는 가난한집의 장녀로 태어나, 외할머니의 밑에서 자랐다.
애기많은 집은 세를 안줘서 주인아줌마와 친해지기 전까지는 몰래 살았던 것이다.
그러다 떼써서 집에 가면, 집주인에게 혼나는 부모님을 볼 수 있었다. 그렇게 이사를 다니며 살았다.
그래서 악착같이 돈벌고 살자고 했고, 이런 어렸을때 기억은 아직까지도 영향을 미친다.
이렇듯 아무리 살아보니 그냥 사는거라고 해도, 상승욕구는 어쩔 수 없다.
아담과 하와도 하나님처럼 될 것이라는 유혹에 빠지게 된 것이다.
그렇게 우리 욕망은 우리의 본능이고, 신처럼 되려고 하는 욕심이 있다.
우리가 유느님이란 말을 하고, 공부의 신이나 갓생이란 말을 하는 것처럼 우리는 신적 존재와 같이 나를 중심으로 세상이 돌아가길 원한다.
성경에서도 야고보와 요한이 주의 우편과 좌편에 앉게 해달라고 발빠르게 움직였다. 그런 것처럼 우리가 높아지고자 하는 욕구는 우리 마음에 항상 있다.
그러니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임하신 예수님은 우리가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단 한순간도 누리지 않으시고 철저히 자신을 비우셔서 종의 형체를 가진 예수님.
그런 철저한 겸손이 주님의 은혜이다.
자기를 비움이란 것이 무엇일까? 자신의 뜻대로 하지 않고 맡기는 것이다.
겟세마네 기도에서 기도할 때에 잔을 옮겨달라고 살고싶어서 기도하셨다.
우리와 같은 성정의 인간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때, 나의 뜻이 아닌 아버지의 원대로 하는 그런 기도를 하셨다. 그렇게 죽기까지 복종하셨다.
모래시계라는 드라마에서 태수(최민수)가 대성고에 전학왔는데, 폭력조직에 괴롭힘 당하지만, 주변학교까지 다 싸워서 평정했다.
그런데 어머니의 눈물을 보고 공부를 잘하는 우석에게 공부를 부탁한다.
그러자 우석은 다신 싸움을 안하겠다고 하면 알려주겠다고 한다.
어느날 상고애들에게 끌려간 태수의 소식을 듣고 달려간 우석은, 맞아서 쓰러진 상황에서 나 약속 지켰다는 우석을 보고 눈물을 흘렸다.
이렇게 사랑은 친구와의 약속을 위해서 참는 것이다. 할 수 있는데 참는 것이다.
폴 트힐리 목사님이 말씀하셨다.
깊이를 뒤집으면 높이가 된다고.
하나님의 겸손의 깊이를 뒤집으니,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이 되었다.
그 고귀한 이름을 우리가 알게 되었다.
우리는 항상 올라가지 못해 불안하고 초조하지만 진짜 평안은 주님의 그런 내려놓음으로 이뤄지는 것이다.
히브리서 2장 7절에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이후엔 심판이 있을 것이라고 한다.
예수님의 40일 시험때, 예수님께 다시 높아질 것을 시험한다.
가졌던 그 영광을 다시 가지라고 이야기한다. 하지만 예수님은 떡이 아닌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우리는 왜 세상것을 좇으며 살까. 더 높아지며 살려고 할까.
하나님의 삶의 원리는 자기를 비움에서부터 시작한다. 나무도 나뭇잎을 떨어뜨리며 자신을 비운다.
비우고 떠나보냈을때 바싹 마르고 앙상하지만, 그것으로 혹독한 겨울을 이겨내고 다시 푸르게 채워지는 것이다.
우리도 내 안에 나로 가득 차있으면 예수님이 들어올 공간이 없다.
우리도 예수님을 믿음으로 근심을 비워보자.
세상을 향한 미련 욕심 좌절을 비우고 예수님을 나의 구주요 참 생명으로 채워보자.
내가 어떤 존재인지 다시 한번 인식하자.
야고보서 4장 14절에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한다고 한다.
우리는 잠깐 보이다 없어지는 안개라고 한다.
또한 시편 35편 1절에는 나의 일생이 주 앞에는 없는 느낌이라고 한다.
사람이 높아봐야 얼마나 높고 가져봐야 얼마나 가질까.
우리는 우리가 누구인지 한계가 없는 존재임을 인식 할 때 하나님이 보이기 시작한다.
시편 103편 13절 14절에 여호와께서 우리를 먼저 긍휼이 여기신다고 한다.
하나님이 우리의 체질을 아시며 단지 먼지뿐임을 기억하신다는게, 그 작은 우리도 기억하신다는 것이다.
이 부분에서 이해가는 부분이 나에겐 특별한 동생이 있다.
14살 차이나는 동생으로, 40이 훌쩍 넘었는데도 내 눈에는 애기같다.
이 친구를 보면 그냥 안되고 불쌍한 그런 느낌이다. 내가 그 동생을 무시해서가 아니라, 그냥 긍휼한 마음이 느끼는 것이다.
우리가 성령이 충만할때 긍휼이 여기는 마음이 나온다.
모든 관계가 상대방이 완벽해서 평화로운 것이 아니다. 그 약점마저 안쓰러워지고 긍휼해 지는 것이다.
우리가 능력있고 인정받는 존재일 수도 있지만, 우리는 하나님 앞에 안개같은 존재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아이같이 사랑해주시고, 긍휼이 여겨주시고, 때를 따라 돕는 영광을 안겨주신다.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 앞에 담대히 나가길 소망한다.
아시다시피 저는 죽을뻔했고, 새로운 생명을 얻었다. 이전보다 더욱 건강해졌다.(암투병 경험하셨음)
그런데 정말 죽을뻔 한게 은혜였다. 살뻔 했으면 어쨌을까.
그런데 살만하니, 누리고 싶고 갖고 싶은게 꿈이 되어버린다. 내 안에 내가 있으면 주님이 오지 못하시는데 말이다.
그래서 그 비움을 훈련해야한다.
주님께서 그 비움을 말씀으로 충분하게 채워주시기를 소망한다.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 하나로 채워주시길 소망한다.
주님의 이름을 우리에게 주셨다.
우리는 그 이름을 의지하고 순종함으로 나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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