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0827 심령부흥회
김운성 목사님(영락교회 위임목사)
터를 견고하게! - 사랑
마가복음 2장 13~14절
<요약>
1. 우리는 총 인원이 늘어나 기뻐하지만, 사실 그 안에는 교회를 떠난 사람도 있다. 잃어버린 한마리에 집중하신 예수님, 우리도 99마리가 아닌 1마리이니, 다른 한마리를 찾아 돌아다니시는 예수님을 본받자.
2. 수많은 인파를 버리고 저 멀리 매달려있는 창기보다 못한 세리 레위에게 다가가신 예수님. 우리도 그 말씀을 따라, 오지 못하는 한명에게 집중해야 하지 않을까.
3. 이 모든 행동 아래엔 사랑이 있다. 선물도 사랑없이 주면 복이 아닌 독이 되듯, 이 모든 행동도 진한 사랑이 먼저이다.
4. 그 사랑으로 나의 다급함을 참고 약속과 질서를 지키고, 다른 이의 생각을 공감하고 양보하자.
5. 예수믿는 사람이라면, 성형외과에는 원래 이뻐지려고 가는 것이 아니라 내가 예뻐서 다른사람 시험들까봐 적당해지려 가야 한다. 그렇게 다른이에게 평화와 화평으로 대하자.
<본문>
13 예수께서 다시 바닷가에 나가시매 큰 무리가 나왔거늘 예수께서 그들을 가르치시니라
14 또 지나가시다가 알패오의 아들 레위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일어나 따르니라
<설교>
부족한 사람을 불러주셔서 3일간 행복하게 말씀나누게 되어 하나님과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터를 견고하게 하여 혼란스러운 요즘 바르게 서있자고 3가지 주제를 골랐다.
첫날은 부흥이란 것으로 하나님을 경외하고 있나 생각해보았다.
두번째날은 성결이란 주제로 봉사나 헌신이 아닌 제대로 하나님앞에 정결한지에 대해 나누었다.
오늘은 사랑인데 우리가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품에 제대로 참여하고 있는가에 대한 내용이다.
오늘의 말씀은 사뭇 상관없어보이지만 그 안에 사랑의 메시지가 있다.
목회할 때, 보내는이가 없는 편지가 있었다. 편지를 받아 읽어 보니 4장정도 되는 정성껏 쓴 손편지였다.
내용은 목사님 교회의 성도라고 하는데, 이제부터는 목사님 교회 나오지 않겠다는 익명의 편지였다.
그 이유는 작은 교회 집사로 섬기고 있었는데, 거기서 분란이 있어 떠돌아다니고 방황하다가 이 교회에 오게 되었고, 소속 교회가 있으니 등록은 안하고 2~3년정도 다녔다고 한다.
이제 상처는 남았지만 피는 멈추었고, 그 교회에서 재건하는데 인원이 필요하다 하여 가게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섭섭한 점도 있다고 한다. 비록 등록은 안했지만 늘 같은 곳에서 3년 가까이 예배를 드렸는데, 한 사람도 어디서 왔는지 관심가지는 사람이 없었다. 저같이 다니는 사람이 없었으면 좋겠다.
괘념치 마시고 힘내세요 라고 써있었다.
늘 같은 자리에 얼굴이 낮선 분이 있던게 있어 짐작은 되나, 잘은 모르니 부목사에게 알아보라고 하고 기도하고 선물드리려고 했다.
그러다 시간이 지나고, 한달이 넘게 지났다. 잊어버리고 있다, 그 편지가 왔던걸 기억하고 물어보니,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그렇게 이 일을 마무리짓고, 크게 상처받은건 아니지만, 그 사람에게 인사도 못하고 마지막에 인사드리지 못해서 아쉬움이 남았다.
그런데 상처받지 않은 이유는, 그분이 좋은 일로 간것도 맞지만, 한명이 떠나가도 교회는 잘 되는데 하는 마음에 상처받지 않았다.
솔직히 목회하면서, 어떤 사람 한명이 힘들었으면, 그 사람이 떠날 때 그것을 오히려 후련하게 생각하거나, 다음 주에 다른 사람이 등록할테니 걱정하지 말라고 하는 경우가 많다.
이렇게 한명이 줄어든 것에 대해 아무도 걱정하지 않는다. 다음주에 두명 더 오면 오히려 부흥했다고 좋아한다. 총 숫자가 늘어난 것만 보고, 빠진 사람에 대해 아파하지 않는 것이다.
목사님마저도 숫자가 늘어난 것으로 목회를 잘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 과정중에 무수한 김길동이 주저앉는 것이다. 주님도 우리와 같았을까? 김길동이 한명 사라졌다고 이길동, 최길동 같은 다른 사람들 오니 상관없다 하셨을까?
주님은 그렇지 않았을 것 같다. 한명 한명에 대해서 생각할 것이다.
동안교회의 주보는 좀 특이하다. 보통 교회들은 출석인원이나 헌금을 정확하게 기록하는 교회가 없다. 예전에는 모든 교회가 정확하게 기록했는데, 언제부턴가 그런 통계란이 서서히 없어졌다.
통계를 왜 안넣냐 했더니 대외비라고 했다. 하지만 그건 정직한 말이 아니었다. 2천년대에 들어오며 한국교회가 줄어들었고, 교세가 감소하고 있었다. 재작년 국민일보 탑 기사중 하나는 한국교회가 10년간 2백만명 줄었다고 하는 기사였다.
그러다 보니 통계를 넣지 않는 것이다. 목회자도 위축되고, 성도들도 전도 안하니 민망하긴 하다. 그래서 출석통계가 빠졌다. 헌금도 마찬가지이다.
그런데 나는 그 출석 통계를 볼 때마다, 왜 출석통계여야 할까 싶었다. 주님이 주보를 만드신다면 출석통계를 만들지 않고, 결석자 통계를 만드실거다 라는 생각을 하였다.
사실 온 사람보단 오지 않은 사람이 걱정되어야 맞다. 오지 못하고 어딘가 마귀의 손바닥에서 놀아나고 있을텐데, 오지 않은 사람들에 대해 통계가 나오고 기도를 해야 하지 않을까.
우리는 와서 있는 이들에게만 관심있고 몇주 다니면 한번쯤 기억하지만 몇달 안보이면 아예 잊어버리고 만다.
예수님께서는 그렇지 않으셨다. 잃은 양 한마리를 찾은 비유와 같이 예수님은 잃어버린 사람에 관심이 많으셨다. 삐딱한 사람들은 99마리에 집중해 비판하고, 내일 아침에 새끼낳을 양들로 부흥할건데 한마리를 왜 찾냐 라고 한다.
하지만 이 비유는그런 입장과 다르다. 우리는 99마리에 속한 줄 알고 그렇지만, 사실 영적으로는 99마리에 해당하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 1마리에 모든 인류가 다 들어있다. 로마서 3장 10절에 의인은 없다니 한명도 없다고 한다.
그래서 우리는 모두 잃어버린 한마리이고, 99마리는 한영혼이 귀하다는 것에 대한 강조의 표시이지, 세상에 99마리인 사람은 없는 것이다.
우리는 다 한마리 양이었다. 주님이 찾아오셔서 우리가 여기 있다. 그래서 우리는 99마리에 이야기하지 말고, 한마리에 집중해야 한다.
오늘 본문 2절은 안어울리는것 같다. 먼저 13절에 큰 무리를 이끌고 바닷가에서 말씀하셨다고 한다.
예수님 곁에 많은 사람들이 모였다. 당시 최고의 인기강사여서 많은 사람들이 몰렸다. 주님이 강단에 서시고 사람들이 빼곡하게 앉아있는 곳이다.
교회에서 강사 부르는건 참 어렵다. 일단 성도들이 모르는 사람에겐 관심이 없다. 시골교회의 순결한 목사님 모셔도 잘 안오신다. 그래서 담임목사 입장에선 유명한 목사님을 모시게 되는 것이다.
큰 교회에 전화하면 뭐 말이 끝나기도 전에 바로 담당자에게 전화가 돌아가고, 담임목사님 스케줄 관리부에 넘겨가고, 차가운 목소리로 3년동안 꽉 찾다고 하고 끝난다. 그렇게 4년 후에 가능하냐 물으니 4년 후는 안받는다 한다.
실제로 있던일인데, 5백명정도 교회에 유명한 강사가 오셨다. 어떻게 모셨는지 치열한 과정을 이야기했다. 그래서 다들 부러워했으나, 두어달 뒤에 그분이 못오시게 되었다고 들어서 풀이 죽었다.
그런데 알고보니, 같은 지역에 10배쯤 큰 다른 교회에 강의를 하러 오게 된 것이다. 이걸 보고 5백명 교회는 큰 충격을 받게 되었다. 나도 눈독들이고 있었지만, 이 이야기를 듣고 포기하게 되었다.
집회하면 강사모시는게 참 어렵다. 그런데 예수님은 얼마나 유명한 강사일까?
예수님은 이렇게 잘 나가는 강사인데, 바닷가에 나타난 것이다. 그렇게 성황리에 바닷가 집회가 이뤄지고, 싸인받고 만져보려는 인파로 물들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런 예수님이신데 어떤 사람이 어려운 처지에 있다고 만나달라고 하면 만나주실까. 아마도 요즘에는 옆에있는 사람이 안된다고 대신 대답할 것이다.
14절에서 예수님이 레위에게 나를 따르라 하신다. 엄청난 교회에서 설교하고 싶은게 사람들의 본능인데, 예수님은 14절에서 단 한명에게 말씀을 건네신다.
대단한 사람도 아니고, 한명을 위해 오라고 부른것도 아니고 못난 대접만 받는 세리에게 예수님이 찾아가셨다. 세리는 창기와 비슷하게 여겨진다. 심지어 길에서 구걸하는 거지들도 창기가 준 돈은 받고 세리가 준 돈은 받지 않았다고 한다.
잘나가는 슈퍼스타 강사인 예수님. 그런 사람이 세리라는 존재감 없는 사람을 향해서 가는게 가능할까.
13절에서는 그냥 예수님이 말슴 잘하시니 사람들이 모였구나 싶다. 하지만 14절을 보면 그 말씀에 붙들리게 된다.
이렇게 예수님이 찾아오신 세리가 누구일까?
바로 나이다. 무시받고 멸시받는 사람이지만, 하나님이 직접 오셔서 말 걸어주신게 바로 나이다.
아까 위에서 말한 김길동 처럼 한사람 없어도 두사람 올테니 걱정하지 말라고 하는게 아니다. 그 한사람이 어떤 존재이든 간에 예수님께서 한명한명 찾아간다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다. 사랑이라는 주제로 이야기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하나님의 성품에 가까워지고 있는가.
우리가 세상을 마구 변화시키고 할 수 없겠지만, 우리가 한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주님이 레위와 무슨 말슴을 하셨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아마도, 바닷가에 오지 않은 것에 대해 물어보고, 그 질문에 레위는 눈물흘리며 제가 안온건 어찌 아냐고 했을 것 같다. 그 울음에 예수님은 바닥가에 온 사람만이 아니라, 오지 않은 사람들을 찾고있다고 할 것이다.
그래서 아까 주보도 생각해보니, 출석자 통계가 아니라 결석자 통계를 만들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주님은 오지 못한 사람들을 안타까워 할 것이다.
아마 그 이유는 다 알고계실 것이다. 너가 근무중이라서, 혹은 너가 나타나면 욕먹을거라서, 그래서 못온거 알고 있다. 울지 말고 나와 함께 가자 라고 하셨을것이다.
사람들은 형편없는 녀석을 제자로 데고다니는 것에 대해 욕을 하겠지만, 예수님은 그것을 꿋꿋이 이기셨다.
그리고 그 레위는 마태가 되었다.
이렇게 무시받고 힘들어 하는 사람에게 다가가 이야기하는 것, 그것이 성경의 말로 하면 사랑인 것이다.
사랑으로 하는 것과 사랑으로 하지 않는 것은 동전의 앞뒷면 같으나 전혀 다르다. 선물을 독일어로도 기프트라고 한다. 그런데 그 뜻이 선물과 동시에, 독이란 뜻도 있었다.
사랑의 유무에 따라 선물이 되기도 하고 독이 되기도 한다. 사랑으로 인해 준다면 선물이지만, 사랑없이 줄때는 뇌물이 되는 것이다. 그렇게 쇠고랑을 차게되는 뇌물은 독이 되는 것이다.
선물과 독의 갈림길에 있는 것은 사랑이다. 그렇게 모든 것을 사랑으로 해야 한다.
우리의 예배는 하나님을 사랑하기에 드리는 예배가 되어야 한다. 우리에게 그 사랑이 없다면, 다 추해지고 결국 독이 되는 것이다. 하지만 사랑으로 한다면 그것이 하나님앞에 아름다운 것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물어본 것은 한가지이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요한복음 21장에 예수님이 여러번 물은 것은 여러번 물어봐서 갈구는 것이 아니다. 15절에 보면, 조반 먹은 후에 이야기하신다고 한다. 먼저 밥부터 먹이신 것이다.
배고프고 힘든 그들. 고기잡으로 디베랴 갈릴리 바닷가에 왔으나, 밤새 한마리도 못잡아 낙심하다가, 예수님 말씀덕에 153마리의 물고기가 낚이고, 베드로에게는 제자가 되었던 날이 떠올랐다.
한 사람이 자신의 직업과 지식을 버리고 가는게 쉬운것은 아닐 것이다. 아마도 생략된 말들이 정말 많을것이다. 그래도 그나마 자세히 나온게 베드로의 이야기이다. 먼저 동생인 안드레가 세례요한을 따라다니다 예수님께 가라는 베드로의 말을 듣고 간 후에, 형에게 예수님을 소개시켜 준 것이다.
그때 첫만남에 예수님이 게바(베드로)라는 이름을 주었고, 새로운 존재로 말씀하여 주셨다. 예수님은 나사로에서 가버나움으로 이사오신 시기이고, 베드로와 같은 지역 사람이었다.
고기잡은 후에 예수님은 베드로의 배를 얻어타고, 베드로는 피곤하지만 배도 빌려주고 했다. 예수님은 바닷가의 사람들에게도 말씀하셨지만, 시몬에게도 같이 말슴하셨다. 시몬은 말씀이 끝났으니 이제 쉬려고 했지만, 예수님은 깊은데로 가서 그물던져 고기를 잡으라고 한다.
그러자 시몬 베드로는 말씀에 의지하여 간다고 한다. 이미 바닷가 사람에게 하시는 말씀을 엿듣고 마음이 조금씩 변하였기에, 예수님께 순종하신 것이다. 그렇게 고기잡은 후, 예수님께 죄송하다 했지만, 오히려 예수님은 같이 가자고 하시는거다.
그렇게 감사했던 그 추억이 있었는데, 21장에서 다시 그 비슷한 경험을 하니, 그때가 생각 나 달려갔던 것이다.
그 자리에는 주님이 직접 준비하신 식사가 있었다. 예수님은 너희가 나를 버리고 물고기나 잡으러 왔냐고 말하실줄 알았는데, 밥먹을때까지 기다리셨다.
그렇게 조반을 먹은 후에, 시몬 베드로에게 물어보았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베드로의 마음은 어떠하였을까. 이렇게 본인을 부인한 나에게 다시 와서 생선을 먹여주시는 주님. 그런 주님의 사랑에 감동한 순간에, 예수님이 물어보신 것이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그 말은 내 끓어오르는 감격과 마음까지 다 아신다는 것으로, 억지로 쥐어짠게 아니라, 참 사랑의 모습인 것이다.
어떻게 바싹 마른 마음에 사랑이 끓어오르는 것일까. 주님이 먼저 보여주신 그 식사 때문이다.
물폄프를 할때, 압력을 회복시키려면 물을 한바가지 부어야 한다. 그 마중물을 부으면 저 밑의 물이 빨려 올라오는 것 처럼, 조반이라는 사랑의 마중물에 베드로의 마음이 끌어올랐다.
그것에 대해 예수님이 말씀하신것도, 내 양을 먹이라와 내 양을 치라 라는 것이었다. 그렇게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하라고 한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우리도 사랑으로 하길 원한다. 무엇이든 사랑으로 하자. 이 세상의 사랑의 질서로 지키자.
운전할 때 앞에 노란불이나 빨간불이면 아무리 답답해도 멈추는 것처럼, 그 질서가 꼭 필요하다. 그 질서가 사랑이다. 맞은편에 급박한 사람도 생각하여 서로 질서를 지켜 움직이는 것 처럼, 사랑이 곧 질서인 것이다.
사랑으로 교회가 , 가정이, 사회가 세워지는 것인데, 능력만 생각하지 말자. 능력이 아닌 사랑으로 이뤄지는 것이고, 돈이 아닌 사랑으로 구원받은 것이다.
예수님이 우릴 무엇으로 구원하셨을까. 많은 사람들이 능력으로 구원하셨을거다 하지만, 전혀 아니다.
예수님이 40일간 시험받을 때, 예수님이 돌을 떡으로 만들었다면 슈퍼스타가 되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영웅은 되지만 십자가는 지지 못하셨을것이다.
마귀는 십자가를 지지 않았으면 했을것이다. 우리가 십자가의 희생으로 구원받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님께 슈퍼스타가 되시라고 자꾸 유혹하는 것이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돌로 떡이 되게 하라 하셨다. 그렇게 대단하다며 꼬시고, 아니라며 꼬시고...
이렇게 마태복음 16장에 내가 누구라고 하느냐에 대한 질문에 여러 이야기를 하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주라 하고, 칭찬받는다.
그 이후에 예수님이 죽었다 살아나실것이라고 했는데, 베드로가 죽으면 안된다고 이야기한다.
그러자 예수님은 사탄아 물러가라 라고 한다. 이렇게 사탄이 원하는 일은 십자가를 지지 않는 것이다. 늘 슈퍼스타로 왕이 되고 영광받아 제자들도 한자리 하는 것이 사탄이 원하는 것이다. 예수님의 십자가라는 구약부터 이어진 약속을 망가뜨리고 싶은 것이다.
이 사탄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있을 때도, 너가 만약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내려오라고 한다. 그렇게 하면 영광받을것이다. 하지만 그 순간 예수의 보혈은 없는 것이다.
그렇게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안내려오시고 우리를 구원할 목적을 이루셨다. 그 사랑의 마음으로 십자가에서 구원을 이루신 것이다.
돈이 굉장히 많은 사람 옆에 있으면 콩고물은 나눠먹을 수 있지만 마음이 편치는 않다. 이쁜사람 옆에 있으면 마음이 편할까. 사실 성형외과는 예쁜사람이 상처주지 않으려 가야 하는데, 어느샌가 예뻐지려 가는 것이다.
사모님이 너무 예뻐도 남성도들이 아쉬워하여 와이프를 보고 한숨쉬기에 문제이다.
이렇게 사역이나 성공등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섬기는 것이다. 옆에 있는 작은 한명에게 따뜻하게 이야기하는 것. 이게 사랑으로 영혼을 구원하는 것이다.
믿음의 터가 견고한 것. 다른 곳에 지진이 일어나도 견고하게 사는 것. 하나님께서 이런 은혜를 공동체와 우리 한명에게 내려주시길 바란다.
동안교회 주일 4부예배 말씀 기록_240901 (9) | 2024.09.02 |
---|---|
동안교회 금요심야중보기도회 말씀 기록_240830 (1) | 2024.08.31 |
동안교회 2024 심령부흥회 말씀 기록_240826 (0) | 2024.08.28 |
동안교회 2024 심령부흥회 말씀 기록_240825 (0) | 2024.08.28 |
동안교회 주일 4부예배 말씀 기록_240825 (0) | 2024.08.2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