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0929 주일4부예배
추성훈목사님
신명기 4:23-24
<요약>
미끼에 홀려 덫에 걸리는 동물들 처럼, 우상에 홀려 죄에 빠지는 우리 인간들. 그 우상숭배는 다른 신을 섬기는 것 만이 아니라 하나님을 하나님이 원하는 방식으로 섬기지 않는 것도 존재한다. 예배를 드리며 비운 마음에, 나의 모습에 대한 자랑이 아닌 하나님의 사고와 방식이 들어오도록 노력하자. 나의 편안함과 즐거움 보다 하나님의 일하심을 생각하자.
<본문>
23. 너희는 스스로 삼가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와 세우신 언약을 잊지 말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금하신 어떤 형상의 우상도 조각하지 말라
24. 네 하나님 여호와는 소멸하는 불이시요 질투하시는 하나님이시니라
<설교>
어릴적 살던 시골엔 쥐가 많았다.
슬레이트 지붕 사이 공간으로 쥐들이 뛰어다녔다.
쥐를 잡을때 가장 효과적인건 끈끈이 주걱이었다. 한번 밟으면 헤어나오지 못하는 끈끈이.
그 주변에 빵이나 과자를 놔두면 끈끈이를 실수로 밟고 끝나는거다.
설치류를 정말 싫어하는데, 어느날은 학교끝나고 주방 싱크대 밑에 붙어있는 다섯마리의 쥐를 보게 되었다. 그걸 본 나는 기겁했고, 어머니께 말하자 태연하게 끈끈이 덫을 반으로 접어 나가셨다.
우상숭배는 하나님께서 가장 미워하시는 죄이다.
예수님의 설교 중에서 여호와의 규례와 법도를 준용하란말 다름으로 나온게 이 우상숭배이다.
우상은 테무나 라는 원어로 형상, 형태를 의미한다.
그런데 두번째 의미는 속이 비었다는 의미이다.
형태는 있지만 속이 빈것.
이것이 마치 빵을 먹기 위해 주변을 제대로 살피지 않고 끈끈이 덫에 걸리는 쥐와 같다.
우리가 우상숭배의 위험성을 알고있지만 우리가 우상숭배에서 자유로운가 할때 네라고 답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오늘 본문에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이라고 한다.
질투에는 두가지가 있다. 파괴적 결과를 갖고오는 질투와 아름다운 관계를 회복하는 질투이다.
하나님은 둘 다 갖고 계시지만 두번째 질투의 의미가 많다.
하나님은 5절 하반부와 6절에 우상숭배의 결과를 세부적으로 말씀하신다.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는 삼사대까지, 사랑하고 계명을 지키는 자의 은혜는 천대까지라고 말씀하신다.
우리는 하나님과 사랑하는 존재인데 하나님을 미워하게 만드는 관계가 우상숭배이다.
사랑하는 연인 사이에 질투라는 것은 당연하다. 가끔 일부러 유발하는 사람도 있다.
이렇게 사랑하는 사이처럼, 나만 바라보라 하는 신이 어디있나.
형태만 있지 유익하게 하는 것이 없는 이 대상에서 벗어나 자신을 사랑하게 하는 신이 또 어디있을까.
그렇게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상숭배의 자리, 죽음과 끝의 자리에서 벗어나게 하시려 노력하시는것 아닐까.
분명한 것은 하나님이 당신의 형상을 보여주신 적이 없다는 것이다. 신 4.15절에 그렇게 호렙산에서도 보여준적이 없다고 하신다.
우리의 형상을 보면 하나님의 형상을 추측할 수 있다. 직접 생기를 부어주시고 만드신 그 형상. 그 형상 때문에 그 애착이 생기는 것일까.
아이들이 학교에서 빚어온 점토인형 하나도 망가지면 아이가 마구 운다. 그런데 직접 짓고 만드신 우리에 대해서는 어떨까.
하나님은 이 4장 15절의 형상없음을 깊이 삼가라고 하신다. 이것은 절대적으로 지키라는 의미와 같다.
우리가 어떤 것이든 그걸 섬기면 우상이 된다고 한다.
신4.16에 어떤 형상이든 만들라고 하지 말라한다. 이게 다른 의미로는 자기를 섬기는 것이라는 의미도 있다.
우상숭배는 세가지가 있다고 한다.
다른 신을 섬기는것,
하나님을 하나님이 원하는 방식으로 섬기지 않은 것,
둘 다 섬기는것,
이 중에서 두번째는 우상을 만드는 의도를 가진 나 자신조차 우상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의미를 내포한다. 하나님의 말씀보다 내가 우선되기 때문이다.
적당하게 신앙생활 하는 것도 하나님보다 내가 우선이기 때문에 우상숭배가 되는 것이다.
삼상 15. 22.에 보면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기름보다 낫다고 한다. 사울에게 이런 말씀을 한 것을 보며, 하나님이 사울을 왕으로 세운 것을 후회하신다고까지 하신 것을 보며, 우리는 하나님의 마음을 다시 생각해볼 수 있다.
사울이 아말렉과의 전쟁을 하나님이 원하시는대로 했다면 하나님께서 사울의 여태까지 모습들을 용서하셨을수도 있다. 아말렉은 매우 악랄하게 행동하여 하나님이 지워버리겠다고 한 족속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울은 하나님이 아니라 자기 뜻대로 그 전리품들을 남겨두었다. 그래서 전쟁에는 이겼지만, 하나님의 마음을 잃어버렸다.
심지어 삼상 15. 12.절에 보면 갈멜에 사울의 기념비까지 세운다. 그러고 나서 13절에는 여호와의 명령을 행했다고 하는 말까지 한다.
이렇게 자신이 생각한대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우상숭배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이름과 기쁨과 영광과 아름다우심을 위해 살아가고 있지만, 우리 예배의 자리가 나를 위한 자리일수도 있다는 것에 두려워해야 한다.
우리가 은혜 받은걸로 끝나는게 아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향,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영광받는 방향으로 가야한다.
전에 예배는 불편해야 한다고 한적 있다. 하나님을 우선으로 모시는 것이 정말 힘든 것이다.
예배는 영적 전쟁이다. 내 안에 가장 우선될 수 있는 나 자신과 싸워야 하는 것이다.
모든 지식이나 욕심을 내려놓고 주님을 보고 사랑하는 그 시간이 필요한 것이다.
아무리 질투가 많은 하나님이어도 전심으로 눈물로 기도하는 자에게 회복과 사랑을 주시는 하나님이다. 그 하나님이 가장 아름다운 분이시고, 주와 같은 분이 없다. 누구도 대신할 수 없다.
하나님이 만드신 세상도 아름답다. 하지만 그것에 미혹되는게 아니라 찬양하라고 만드신 것이다.
하나님은 이미 말씀으로 그분의 성품과 속성을 보여주셨다. 이 세상의 논리와 멋이 아니다.
그 누구도 겉모습으로는 그 사람을 알려줄 수 없다. 만나서 이야기하는 것이 그 속을 알 수있다.
소개팅때 얼굴과 분위기에서 첫 느낌을 얻는다.
하지만 그 첫만남을 알게 되는 것은 대화에서 나오는 그 속사람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이 어떤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하나님의 성품을 배워갈 때 그 성품에 가까워지는 것이다.
우리가 만든 우상은 겉은 화려하지만 그 실체는 생명이 없어 그 안에 빠져들게 만드는 것이다. 돈이 스마트폰이 시간날때 보는 그것들이 바로 섬김이 아닌 단지 도구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오늘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그 젖과 꿀에 홀리지 말고 오직 여호와를 보는 것이 되자는게 모세의 신명기이다.
나를 섬기기보다 하나님을 섬기자. 그분을 따라가서 그 형상을 섬기는 주님의 자녀가 되자.
은혜받고 일주일을 사는 것도 맞는데, 하나님께 그 마음을 드리고 비운 곳에 무엇이 들어올지 기대해보자.
그 곳에 하나님이 생각하지 못하는 놀라운 기회를 주실 것이다. 하나님이 그것을 타파하고 주님을 섬기도록 인도해주실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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