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1117 주일4부예배
추성훈목사님
여호수아 5:13~15
제목: 기억하는 신앙4 - 거룩한 전쟁
<요약>
이스라엘은 요단을 건너고, 만나와 메추라기가 종료되고 유월절을 다시 행하는 등 하나님의 신실하시며 정확하신 공급을 다시 기억하게 되었다.
그들은 이제 하나님께서 앞장서시는 전투를 맞이하며, 거룩한 전투를 하러 출발했다.
우리도 하나님이 공급하심을 기억하고, 앞서가신 주님을 따라 나아가길 소망한다.
<본문>
13 여호수아가 여리고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에 눈을 들어 본즉 한 사람이 칼을 빼어 손에 들고 마주 서 있는지라 여호수아가 나아가서 그에게 묻되 너는 우리를 위하느냐 우리의 적들을 위하느냐 하니
14 그가 이르되 아니라 나는 여호와의 군대 대장으로 지금 왔느니라 하는지라 여호수아가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 절하고 그에게 이르되 내 주여 종에게 무슨 말씀을 하려 하시나이까
15 여호와의 군대 대장이 여호수아에게 이르되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하니라 하니 여호수아가 그대로 행하니라
<설교>
가나안으로 들어온 이스라엘 백성에게 변화가 일어난다.
5장 10절에는 유월절을 지킨 이야기가 나온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길갈에서 첫번째로 유월절을 지켰다. 이 절기는 다른말로 기쁨의 절기로, 백성들에게는 구원의 은혜에 감사하는 절기였다.
이 유월절은 출애굽부터 광야생활이 끝날때까지 딱 세번 지켜진 절기였다. 이집트에서 문설주에 피를 바르고 무교병과 쓴나물을 먹으며 마지막 심판을 면했던 것이 첫번째 유월절이었다. 그 당시에 집밖에 나가서도 안되었으며 허리에 끈을 두르고 지내야 했었다.
그 시기에는 이집트의 모든 처음 난 것이 죽은 시기였고, 큰 울부짖음이 있던 시기였기 때문이다.
그 첫번째 절기는 출애굽을 위해 급하게 했던 시기였다.
두번째 절기는 민수기 9장에 시내광야에서 하나님의 강력하신 역사하심을 상기하며 이뤄진 절기이다.
하나님의 복을 기억하며 지켰던 의식이었다.
그리고 39년만에 약속하신 하나님의 신실함을 기억하며 길갈에서 유월절을 지냈다.
그리고 이스라엘에 또하나의 변화가 있었다.
5장 12절에 이제 만나가 끝나고 그 땅의 소출을 먹었다.
하나님께서 이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에 입성한 이스라엘에게 만나를 공급하지 않아도 되겠다고 결정하신 것이다.
이를 통해 광야시대가 끝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40년간의 만나가 끝났을때, 백성들은 조금 부담스럽고 두려웠을수도 있다.
하지만 하나님은 이 새로운 시대를 열며 깨닫게 하신 사실이 있다.
첫번재로 하나님의 신실하고 변함 없는 공급하심이다.
가나안에서 경작하여 먹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이다. 은혜는 자격이 없는 자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호의와 선물이다.
그런 보편적인 은혜가 햇빛과 비, 공기와 여러 자연들이다. 그것이 우리의 공로로 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은혜인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땅에서 씨뿌리고 먹고 사는 것도 은혜인 것이다.
씨앗이 크기 위한 햇빛과 비, 여러 자연의 섭리는 우리의 힘으로 얻을 수 없다. 그렇기에 우리는 은혜로 사는 것이다.
전도서 5장 19절에 제 몫으로 수고하고 즐거워 하는 것은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한다. 하나님이 그 은혜를 주시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 어떤 것도 할 수 없으므로, 하나님을 경배하고 섬기는 것이 중요하다.
두 번째로 하나님의 세밀하고 정확하신 공급이시다.
황량한 광야에서 매일같이 만나를 내려주시고 메추라기를 주셨지만, 스스로 씨뿌리고 수확하는 땅에서는 공급을 멈추신다. 이것은 곧 하나님이 모든 상황을 세밀하게 관찰하신다는 것이다.
우리의 모든 순간이 하나님의 돌보심 안에 있다.
시도때도없이 먹이고 공급만 하신다면 우리는 앉아서 받아먹기만 하는 게으른 자가 될 것이다.
그런 감사를 잊어버리게 될 것이다.
우리의 삶도 그렇다. 우리 삶의 모든 순간에 하나님은 바라보시고 관찰하시고 개입하신다. 그리고 정확하게 공급하고 도우신다.
어떨 때는 공급이 없는 경우도 있다. 그것은 내가 할 수 있음에도 마냥 하나님께 손만 벌리고 있는 경우일 수 있다. 스스로 번아웃이고 지쳤다고 하지만 하나님은 아직 아니라고 판단한 것이다.
그렇다면 그때, 하나님께 기도해야 한다.
나에게 힘이 남았다면 일어나게 해달라고, 눈앞이 캄캄하면 바로 볼 수 있는 지헤를 달라고, 힘을 달라고 기도하고 믿고 일어나야 한다.
나는 못하지만, 하나님 덕분에 힘을 얻고 해 보는 것이다.
나의 가고 서는 것을 가장 잘 아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그렇게 나를 잘 아시고 돌보시는 분이, 상황에 따른 힘과 지혜를 주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다.
이스라엘 백성은 가나안땅에서 경작함으로 하나님의 또다른 은혜를 경험하고 있다.
하지만 아직 과업이 많다. 가나안을 정복해야 한다. 이 과정에서 여호수아는 많은 고민이 있었겠지만, 하나님은 그 마음과 생각마저 다 알고 계셨다.
그래서 13절에 특이한 만남이 이뤄진다.
칼을 빼들고 손에 들고 있는 사람. 아군인지 적군인지 모르겠는 정체불명의 인물. 하지만 그는 무엇도 아니고, 여호와 군대 대장이라고 소개한다.
우리가 생각하기에는 여호와의 편이면 이스라엘 편이어야 하는데, 왜 아니라고 했을까.
그는 오직 하나님의 명령을 대언하는 사람으로 왔다는 것이다.
그러자 여호수아는 그의 말을 듣고 그 존재를 알아보아 엎드렸다.
하나님의 현현을 여호수아가 보았을 때 고개를 숙일 수 밖에 없는 것이었다.
이 사자의 아니라는 말은 여호와께 경외와 존경을 보이지 않는다면 그 누구의 편도 되지 않을 수 있다는 말이지 않을까.
우리는 항상 여호와는 나의 편이라고 하지만 우리는 그에 합당한 존경과 태도를 보이고 있을까.
내가 하는 입술과 행함이 일치되지 않으면 내 고백이 거짓이라고밖에 할 수 없지 않을까.
물론 예수님의 성육신과 대속이 있었지만, 그 사랑을 진심으로 온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경외하지 않는다면, 그 사랑의 실체이신 예수님이 전달되지 않는다면, 예배를 드리고 있지만 기뻐 받으실까.
우리가 진짜 예배자리에 두렵고 떨림으로 나왔을까. 아니면 구경하거나 예배를 판단하진 않고있을까.
매주 그냥 입벌리고 있다 돌아가는 예배자를 하나님이 받으실까.
여호와 군대대장의 아니라는 답변은 우리의 자격이 있는지 증명하라는 것이다.
이렇게 말을 하면 고개만 숙이고 있는 경우가 있지만, 이것은 설교자 본인에게도 하는 말이고, 스스로 생각해볼 문제인 것이다.
정말 이 예배 가운데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오고있나. 하나님의 자녀의 자격을 우리가 태도로 보답하고 있나.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허울과 명찰만 갖고 살려 하지 않는가.
하나님은 그런 상황이 보이면 시험을 하시면서까지 확인하신다.
내 삶에 도저히 앞이 보이지 않을 때, 하나님은 칼을 들고 서서 나타나시며 말씀하신다. 그리고 우리가 어떻게 하는지 알아보신다.
그 분 앞에 합당한 태도를 취할 수 있도록, 매일 나를 보고 감찰하시고 함께하시는 하나님을 생각하고 그 십자가의 모습을 따라살자.
14절에 여호수아는 내 주여 종에게 무엇을 말씀하시려니까 라고 묻는다. 주인과 종의 태도를 명확히 하며 주님께 여쭤본다. 우리도 그런 주님께 구하는 태도를 해야 하지 않을까.
그러자 15절에 신을 벗으라고 한다. 우리는 이런 명령을 호렙산 떨기나무에서 임하신 모세에게서도 보인다.
고대에는 발을 정말 더럽다고 여겼다. 더러운것과 가장 먼저 접촉하기에 더러운 것으로 여겼다. 그래서 발바닥을 보이는 것도 큰실례로 여기는 것이었다. 그래서 발바닥을 뒤로 하고 앉는 습관이 발달했고, 발은 죄와 더러움의 상징이었다.
그래서 모세와 여호수아에게 이 수준에 맞추어 신을 벗으라고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모세의 호렙산과 여호수아의 여리고 성 앞이 거룩해서 그랬을까. 아니다. 하나님이 계신 곳이 거룩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이 가나안 전쟁이 무엇인지 말해준다.
첫번재로 가나안 전쟁은 여호와의 전쟁이다.
여호와께서 제일 앞에서 진두지휘하는 전쟁이다.
여호와의 승리가 보장되어있는 그 전쟁이다.
두 번째로 가나안 전쟁은 거룩과 비 거룩의 전쟁이다.
하나님은 당신의 거룩함으로 비 거룩함을 격파하시고 승리를 증명하려 하는 전쟁인 것이다. 우리의 싸움은 혈과 육의 싸움이 아니다. 우리의 정체성은 우리의 거룩함으로 증명되는 것이다. 이 땅의 모든 싸움은 나의 싸움이 아닌 거룩한 싸움인 것이다.
세속의 기쁨을 뛰어넘은 영원의 기쁨으로 사는 것이다.
시들지 않는 영원한 기쁨을 갖고 사는 것이 우리의 구원인것이다.
우리는 여호와 군대대장이 앞장선 뒤에 함께 그 편에서 싸우는 것이다.
세상은 이런 우리를 우습게 보지만, 우리는 우리의 거룩함을 목숨을 걸고서라도 지켜야 하는 것이다. 세상은 우릴 책임지지 않는다. 지켜주지 않는다. 우리의 몸은 하나님의 거룩한 성전인 우리가 지켜야 하는 것이다. 온 마음을 담고 그분을 경배할 때 하나님이 이 대적들을 싸워주시고 이겨주시는 것이다.
내가 하나님 앞에 어떤 태도로 살아갈까. 사랑하는 앋르을 벌레같은 날 위해 죽이신 하나님에 대한 태도가 중요한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거룩함으로 무장할 때 내가 아닌 하나님이 싸우시는 거룩한 전쟁이 되는 것이다.
우리의 싸움은 거룩과 비 거룩의 싸움이다. 비거룩에 가까워질 때 거룩과는 멀어진다. 우리에게 거룩의 필터를 장착해 거룩의 말들이 나오도록 노력해보자.
거룩의 필터링을 장착해보자.
그 말씀이 우리를 살려낼 것이다.
어떠한 순간에서도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의 순간을 두고 경배할 때 그 비 거룩을 깨부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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