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1201 주일4부예배
추성훈목사님
고린도후서 11:30-33, 12:9-10
제목: 약함이 자랑되는 삶
<요약>
바울이 도망친 사건은 참 부끄럽고 약한 기억이었다. 하지만 주님은 그 약함을 들어서 자랑으로 만드셨다.
우리도
<본문>
11장
30 내가 부득불 자랑할진대 내가 약한 것을 자랑하리라
31 주 예수의 아버지 영원히 찬송할 하나님이 내가 거짓말 아니하는 것을 아시느니라
32 다메섹에서 아레다 왕의 고관이 나를 잡으려고 다메섹 성을 지켰으나
33 나는 광주리를 타고 들창문으로 성벽을 내려가 그 손에서 벗어났노라
12장
9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10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
<설교>
한가지 질문으로 시작하고 싶다.
우리가 주식회사 천국에 입사하려 이력서와 자기소개서를 쓴다면 무엇을 써야할까?
아마 세상과는 다른 기준일텐데, 가장 중요한건 뭘까?
아마 내가 생각하기에는, 소심함, 이기적임, 신체적 결함 등... 그것을 강점으로 만들고 싶은 사람을 우대할 것 같다.
만약에란 전제를 붙였지만, 이 땅에서 펼칠 천국은 세상의 좋은 조건으로 가는 곳이 아니다.
돈과 권력 지식 행위 업적으로는 천국과 어울리지 않는다.
천국과 어울리는 것은 나의 약함을 아는것이다. 그리고 그 약함을 자랑하는 것이다.
산상수훈에서 나은 마음이 가난한 자부터 박해를 받는자 까지, 세상과는 다르다. 강한 힘으로 권력을 쟁취하기보다 그 약함을 인정하고 세상을 바꾸는 것이다.
오늘 나온 사도바울은 자신의 약함으로 세상을 바꾼 사람이다.
빌 3.5-6절을 보면 바울이 세상적 율법적으로 어떤지 나온다.
율법으론 바리새인의 완벽과 흠이없는 모습.
그 모습에 심취하거나 자랑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뒤이은 7-9절에 나온다.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 그것만 자랑하는 것이다.
과거의 자랑보다 더욱 고상하고 아름다운 자랑이 생긴 것이다.
율법이 구원의 열쇠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율법의 행위만으로는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고 여길 수 없는 사람이 단 한사람에 없다는 것이다.
바울의 자랑은 자랑하지만 뭔가 자기비하적인 자랑이다. 자신의 과거를 비꼬는 자랑이었다. 어쩌면 그 비꼼을 자랑한것도 같다. 율법을 넘는 의가 나타났고 그것을 만났기 때문인것 같다.
로마서 3.22절에 그 율법을 넘는 의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나타나는 의라고 한다.
요한복음 1. 12-13에도 하나님이 죄값을 대신 지불하신 내용이 나온다. 그렇게 하나님의 자녀되는 권세를 받은 것이다.
나의 약함은 그대로 있지만, 그 약함을 나를 지배하거나 옭아매지 못하고 자랑으로 바꾸시는 것이 예수님인 것이다.
나의 약함을 예수 그리스도로 바꾸는 통로. 그 통로가 됨을 선포하자. 나의 약함을 숨기고 감추는 것이 아니라 드러내는 것을 생각하자.
바울은 그렇게 자신의 학력과 능력이 자랑이 아닌 배설믈이기에 말하길 꺼려하고 있다.
그런데 아마 그에게 이런 시간이 없었다면 지금의 자랑이 열마나 중요한지 몰랐을수도 있다. 그래서 이런 부분을 언급하며 이야기했다.
고린도 교회는 거짓교사로 위기에 빠진 시기였다. 바울과 다른 이야기로 분별안되는 상황이었다. 오히려 거짓교사들이 지극히 큰 사도라고 지칭하는 것이다.
그래서 고린도 성도들을 바로잡기 위해 이 일을 하는 것이다. 고전 11. 11-12절에 정말 하나님을 위해 거짓교사들을 비판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거짓교사들을 받아들이는 고린도 성도들에게 이야기하며, 나도 그들처럼 자랑해볼테니 그 말이 맞는지 들어보라고 한다.
바울이 자랑한 것은 두가지였다.
첫번째로 예수 그리스도이다.
고후 11.23절에 감옥갇히고 매맞고 배 표류하고 강도 등의 위험에 빠졌다고 한다. 그 어떤 사람보다 수고하고 다양한 위험을 겪은 것이다. 거짓교사들이 편안히 입만 벌릴때 자신은 죽음의 입구에서 돌아나왔다.
그런데 바울은 이런걸 배설물과 같이 이야기한다. 우리의 자랑이신 예수님도 고난 받았으니 나도 고난받는게 마땅한데 이게 자랑이냐 하는 것이다.
눅 17.2., 딤후 2.3. 벧후 4.19에 예수믿음으로 당할 고난에 대한 이야기들이 있다.
고난은 힘들지만, 예수믿는자들에게 있어 고난은 믿음에 이르는 단계이다. 예수믿다보니 별 일이 다생긴다는 것이다.
우리가 연단받고 하나님께 더 함께 가도록 생각하자. 고난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말고 받아들이자.
그럼 고백하고 자랑할 약함은 무엇일까. 바로 예수믿고도 바뀌지 않은 수치심과 이기심과 정욕 등이다.
고후 11.32-33에 바울이 들창문으로 도망친 사건이 나온다. 당시에는 유리가 없으니 창문이 뚫려있긴 한데, 한사람 가기 비좁은 곳이었다. 그렇게 추하게 밖으로 나와 광주리타고 도망쳤다.
이렇게 죽음도 불사하겠다던 사람이 초라하게 도망친게 자랑일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랑했다.
고후 12. 5-7에 보면 육체적 고통이 있다. 바울은 그 못남을 사탄의 사자라고 하며 자만하지 않도록 보낸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12.9에서 내 능력이 네게 족하다 이는 네 능력이 약한데서 온전해지리라 하고 들은 것을 고백한다.
바울은 육체의 가시로 삼층천에 다녀온 지극히 큰 계시를 받게 되었다. 그런데 그 큰 비밀을 갖고있느니 자만할까봐 가시가 생겼고, 하나님은 내 은혜가 내게 족하다고 하신다.
우리의 현실의 문제는 나의 약함을 인정하는 것 부터다. 예수의 힘으로 온전히 발휘될 때 바뀌는 것이다.
신앙의 가장 큰 문제는 내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아니다.
그게 아니고 문제를 통해 무엇을 보게 하시냐 라는 것이다. 온전히 주님을 바라보고 사랑하자는 것이다.
내 목숨 하나 살자고 들창문으로 기어나가면서 얼마나 자괴감이 들었을까. 그 도망가는 현장 속에서 피할길을 예비하시고 도우시는 그 하나남을 만난 것이다.
하나님은 육체의 가시보다 그 심연의 자만을 보셨다. 그리고 그 가시가 은혜라고 말씀해 주신다.
우리가 주님을 볼 때 그 회복보다 더 큰 기쁨이 있다. 더이상 약함이 문제가 되지 않는다.
구약 사사기에 삼손이 나온다. 나실인인 삼손, 강한 힘의 삼손. 근데 이 힘은 원해 삼손이 아닌 하나님께 있는 것이었다. 그렇게 나귀턱뼈 하나로 천명을 죽이게 하셨다.
하지만 거룩함을 상실하고 내 마음으로 살아가는 그 삼손. 나중에 들릴라에게 빠져 머리잘리고 눈뽑혀 멧돌이나 돌리는 삼손.
그러나 하나님은 그 안에 소망의 빛을 남겨두셨다.
그렇게 삼손은 자신을 붙들고 있는 작은 소년에게 집을 받치는 기둥을 안내해달라고 요청하고, 사사기 16.28절에 나오듯 회개를 고백하고 마지막 순간까지 사용하신다. 살아있을때보다 더 많은 사람을 죽인 삼손. 그 회개의 못소리를 들으시고 주님이 도우셨다.
많은 그리스도인이 현실의 삶에서 주님을 놓친다. 내가 잘해서 되는게 아닌데, 하나님을 보지 않는다. 그리고 상황이 안좋을때 약함을 벗어나려고만 한다.
사실 그 상황엔 예수를 더 바라보게 하려는 뜻이 있는데, 그것을 모르고 벗어나려고만 한다.
나의 힘과 지혜가 없이는 설수 없는 우리임을 기억하자.
남들처럼 형통하지 못할수도 있지만 매일 슬픔과 눈물에서 살아도 그 슬픔 속에 예수의 눈물 안에서 산다는걸 안다면 이제 우리의 약함은 약함이 아니다. 그걸 자랑할 힘이 생기는 것이다.
우리의 나라는 이 땅에 있지 않다. 약함을 인정해야 들어갈 수 있는 나라다.
이미 예수님이 세상에서 그 나라를 사는 방법을 보여주셨다. 가장 강하지만 약함을 택하시고, 철저히 약한 인간으로 오셨다. 이사야 53.7.에서처럼 곤욕을 당할때도 도축되는 양 같아도 입을 열지 않고 묵묵히 견딘다. 하나님께 벌받는다 놀림받을때도 이겨내신다. 그의 징계는 우리의 죄 때문이다. 우리는 어떤 약함이 있을까. 세상의 수많은 시선과 소리가 두려운가.
예수님도 바울도 약했다. 많은 문제가 괴롭힐 것이다. 하지만 바울의 고백을 기억하자.
약할때 강함되시는 주님을 기억하자.
나의 약함이 배설물이 아니라 주님이 역사하시는 것임을 믿자.
그때 함께 웃고 우는 공동체가 있음을 믿자.
바울이 들창문을 나갈 때 공동체가 광주리를 준비해 주었다. 신앙의 시기에 바울과 공동체가 함께한 것이다. 우리의 약함이 부끄러움이 아니라 강함이 될 수 있음을 기억하자.
이번 주일이 4부 마지막 설교인데, 아마 110번정도 말씀을 나눈 듯 하다.
두가지만 바라고 싶다.
첫번째로 어떤 상황이 와도 예배는 드리자. 예배는 못난 목사때매 드리는게 아니다. 하나님께 드리자. 목사가 떠나서 예배 안오지 말고 하나님께 나아가자. 예수님께 더 나아가자.
두번째로 내 옆의 지체를 소중히 여기자. 나의 약함을 품어줄 수 있는 그 존재가 내 옆의 지체이다. 그만두고 싶은 적도 많고 설교하기 싫은 적도 많은데 그때 조금의 격려와 응원이 큰 위로가 되었다. 말로는 안해도 마음으로 아멘을 외치고 점차 성장하고 있다는 것이 위로였다.
오늘 안울거다. 하도 울어서 눈물이 말랐다. 홀가분하고 감사하게 이 단을 떠날거다. 하지만 같은 사역을 하며 같은 교회에서 함께하고, 응원하고 중보할 것이다.
의심과 염려가 아닌 믿음으로 한걸음 나가길 소망한다.
감사했고 사랑했다. 이 시간들 잊지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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