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0505 주일 4부예배
눅 23. 33~38.
추성훈목사님
<제목>
십자가2 - 마지막 한숨까지 사랑을 외치다
<요약>
만신창이가 된 상태에서도 마지막 순간까지 사랑하시는 예수님.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하심을 알고, 우리의 무지함을 알기에, 용서라는 사랑의 모습을 보여주실 수 있으셨다.
우리도 우리의 힘이 아닌 성령의 힘으로 용서와 사랑을 시작해보자.
<본문>
누가복음 23장
33. 해골이라 하는 곳에 이르러 거기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고 두 행악자도 그렇게 하니 하나는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있더라
34.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 그들이 그의 옷을 나눠 제비 뽑을새
35. 백성은 서서 구경하는데 관리들은 비웃어 이르되 저가 남을 구원하였으니 만일 하나님이 택하신 자 그리스도이면 자신도 구원할지어다 하고
36. 군인들도 희롱하면서 나아와 신 포도주를 주며
37. 이르되 네가 만일 유대인의 왕이면 네가 너를 구원하라 하더라
38. 그의 위에 이는 유대인의 왕이라 쓴 패가 있더라
<설교>
오늘은 누가복음에 십자가의 예수님을 이야기할 것.
십자가에 매달리실때는 이미 만신창이된 상태였다.
1km를 60kg의 십자가를 지고 갔어야 한다. 더이상 못들고가자 구레네시몬에게 억지로 십자가를 메개 할 정도로 예수님의 상태는 최악이었다.
비아돌로로사(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간 길)라는 순례길이 있다. 13세기에 만들어진 상징적인 길이지만, 예수님의 사건들을 이야기해주고 하면서 예수님을 더 깊게 느끼게 되었다.
우리의 순례길과는 다르게, 모든 인류이 고통을 지고 모든 것을 바치사 화목제물이 되신 예수님. 그 예수님께 감사하자.
처음 청년부에 부임했을때와 다르게, 불평하고 짜증하는게 좀 줄었다. 각자의 비아돌로로사를 걸어다니면서도 말씀을 삶의 근거로 삼아 기도하며 걸어가는 청년들이 점점 많아지는 것 같다는 것이다.
수요 영성집회에 많이 오는 청년들, 여전히 자기 지식과 논리와 경험을 믿는 사람도 있지만, 점차 변화되는 것을 믿고 있다.
예수님은 자신의 권세를 숨기시고 낮추어 섬기셨다. 그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이 땅을 살아가는 원리인 말씀을 따라 사신 것이었다.
하나님이 창세로부터 어떤 계획이 있으셨나, 왜 고난과 아픔이 있는가... 이런 주제를 묵상하며 말씀의 원리를 살아가는 우리가 점점 예수님의 모습으로 성장하는 것이다.
힘들때만 답안지 보듯 보는 것이 아니고, 언제나 말씀 앞에 살아가야 하는데, 교회만 나오면 된다는 식으로 나온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 부름받은 자이다 자녀는 부모 없이는 살 수 없는 자이고, 부모와 함께 할 때 자녀와 부모 모두 기쁘다.
힘들때만 이야기하는 자녀처럼 있지 말자. 왜 하나님의 자녀로 믿지 못할까. 왜 말씀의 원리로 살지 않는가. 왜 불평만 하는가.
오늘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은, 그 고통속에서도 놓치지 않는 원리가 있다.
눅 23. 33~34를 보면, 예수님은 끝깢 사랑하신다. 죽어가는 상황에서도 좌우편의 행악자들에게 사랑을 이야기하신다.알기 때문에 원망하지 않고, 오히려 그들을 위해 기도하고 계시다.
믿는 도끼에 발등을 찍히면 평소보다 큰 아픔을 겪는다. 그렇게 사람과의 관계는 언제깨질지 모른다.심지어 설교하는 본인조차 믿을 것이 아니다. 목사는 예수님을 믿으라고 하는 사람이지, 목사를 믿으라고 하는 사람이 아니다.
우리의 신앙은 우리가 지켜야 한다. 남들을 믿지 말자. 우리의 믿음의 대상은 오직 주님 뿐이다.
이게 옆에 있는 지체를 불신의 대상으로 여기란 말이 아니고, 옆의 지체를 긍휼의 대상으로 보라는 이야기이다.
언제나 실수하고, 아프고, 기대할 것 없는 사람이므로, 그들을 긍휼의 대상으로 보는 것이다.
용서는 사랑의 가장 큰 이름이다. 예수님은 왜 십자가에서 용서를 이야기셨을까?
첫째로 ,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아시기 때문이다.
요한일서 4.10~11.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이다.
내 힘으로 사랑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화목제물로 보내신 것이다.
하나님은 사람들을 사랑해서 아파하는 그 하나님으 마음을 이해하시기에 그들을 용서하고 사랑하자는 이야기를 하신 것이다.
둘째로, 우리의 무지함 때문이다.
눅 23. 24. 자기들이 한 것을 알지 못한다고 한다. 그럴 정도로 영적으로 무지한 상태인 것이다.
어떤 행위로 하는 지도 모르는 시기. 그 상태에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그들을 더 사랑해주어야 한다. 방치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처럼 그저 사랑해야 한다.
우리도 살아가면서, 무지함으로 일관하는 사람들을 만날 때가 ㅇㅆ다. 우리가 하나님께 상황이나 반응과 필요없이 조건없이 사랑하셨듯, 우리도 어떤 조건이나 상황과 상관없이 서로 사랑해야 한다.
마 18장에 베드로가 질문한다. 형제가 제게 죄를 범하면 몇번해야 되냐고 묻는다. 그런데 예수님은 요 18.22절과 같이 7의 70배만큼 하라고 하신다.
이와 비슷하게 1만달란트 빚진자의 비유가 있다. 현재가치 16조의 빚. 주인은 불쌍히여겨 다 탕감해주었다. 스플랑크 리조마인이라는 불쌍한 마음. 그 마음으로 16조를 탕감해주었다.
그러나 그 사람은 100데나리온 빚진자를 옥에 가둔다. 이게 우리모습이다. 16조를 탕감받고 왔는데, 자기의 돈은 고발한 것이다. 그 무지한 종의 결말은 다시 그 빚의 값을 치루게 되었다.
이 이야기는 우리가 우리의 형제자매를 용서하지 않으면 하늘아버지께서도 그렇게 할 것이라는 말을 하려고 하신 것이다.
1만달란트와 100 데나리온은 60만배 차이다. 우리가 1때문에 59만 9999룰 잃어버린 것이다.
요한일서 4.11절과 요한이서 1.6절과 같이,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해서 독생자를 보내셨다. 우리가 예수님덕에 우리의 무지함이 해결된건 아니다. 하지만 우리의 무지함을 극복하기 위해, 서로 사랑하라고 하셨다.
요한일서 4.12. 우리가 하나님을 본 적은 없지만 하나님을 사랑하면 그 사랑이 완성되는 것이다.
때로는 자존심을 꺾으며 화목하기로 힘쓰는 것, 그것이 하나님의 안에 거할 수 있는 비결이다.
이를 은밀하게 도와주시는 분이 성령님이다. 그 성령님을 만나자.
하나님은 아들을 희생하신 것이 가장 위대하고 유일한 방법이었다. 이제 그런 방법은 없을 정도로 강력한 방법이었다. 우리는 단순한 감정으로 이것을 받아들이면 안된다. 우리가 어떤 실천을 살아가야할지, 항상 선택하며 살아가야 한다.
절대로 내 힘ㅇ로 살 수 없다. 성령의 말씀을 따라 살아가자.
우리도 용서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먼저 나를 사랑하신 하나님을 묵상하며, 거기서 나에게 용서할 수 있는 힘을 달라고 간구해보자. 우리가 어떤 모습인지를 확인하자. 우리가 그 스플란코 리조마인을 실천할 수 있도록 해보자.
사랑은 하나님의 명령이다. 사랑은 하나님을 경험하는 최선의 방법이다. 힘들겠지만, 내키지 않겠지만, 십자가에서 미작 숨을 내쉬면서 죄를 사하신 주님처럼 살아가보자. 그래야 하나님이 내 안에, 내가 하나님 안에 있음을 알 수 있다.
한번 주님의 사랑을 기억하며, 삶의 마지막 목적까지 사랑해보자. 사랑의 기초를 세워가보자. 예수님의 사랑처럼 그 사랑을 실천하고 생각하며 살아보자. 스플랑코리조마인이 회복되는 삶을 살아보자.
동안교회 주일 1부예배 말씀 기록_240512 (0) | 2024.05.21 |
---|---|
동안교회 시선기도회 말씀 기록_240510 (0) | 2024.05.21 |
동안교회 시선기도회 말씀 기록_240503 (0) | 2024.05.21 |
동안교회 수요영성집회 말씀 기록_240501 (0) | 2024.05.21 |
동안교회 주일 4부예배 설교 기록_240428 (0) | 2024.05.2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