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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안교회 주일 1부예배 말씀 기록_240512

설교말씀 모아/Dongan 주일 및 기타예배

by Choorysostom 2024. 5. 21. 12:12

본문

240512 주일 1부예배

눅 1 11~17
김형준 목사님

<요약>
나인성 과부의 아들을 살려주신 예수님.
예수님은
1. 우리에게 찾아오시는 분
2.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는 분
3. 우리에게 생명과 소망을 주시는 분이시다.

이 과부를 만남은 원어적으로 보면 의도된 것이었고, 내가 기독교를 선택했다고 하지만 사실 예수님이 나를 선택으로 인도하신 것이었다.
또한 예수님은 스플랑코 리조마인(창자가 끊어질 듯한 아픔으로 불쌍히 여김)이란 표현을 쓸만큼 우리를 매우 사랑하신다.
마지막으로 예수님은 당시의 사회통념에 따라, 아들을 잃고 구걸하거나 몸파는 것밖에 안남은 과부처럼 절망밖에 안남은 인생에, 청년을 다시 살린 것과 같은 사랑으로, 생명과 소망을 부어주신다.


<본문>
누가복음 7장
11. ○그 후에 예수께서 나인이란 성으로 가실새 제자와 많은 무리가 동행하더니
12. 성문에 가까이 이르실 때에 사람들이 한 죽은 자를 메고 나오니 이는 한 어머니의 독자요 그의 어머니는 과부라 그 성의 많은 사람도 그와 함께 나오거늘
13. 주께서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울지 말라 하시고
14. 가까이 가서 그 관에 손을 대시니 멘 자들이 서는지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하시매
15. 죽었던 자가 일어나 앉고 말도 하거늘 예수께서 그를 어머니에게 주시니
16. 모든 사람이 두려워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이르되 큰 선지자가 우리 가운데 일어나셨다 하고 또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셨다 하더라
17. 예수께 대한 이 소문이 온 유대와 사방에 두루 퍼지니라

<설교>
복음서를 통해 내가 믿는 예수님을 묵상합니다.
예수님이 죽은사람 살리신 것이 3건이 나옵니다.
오늘의 사건은 그 3가지 중 나인성 과부의 아들을 살린 내용입니다.
이 사건을 통해서 예수님의 소문이 퍼져나가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백부장의 딸을 살리신 후에 장례를 목격하시게 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참여한 청년의 장례였습니다.
예수님은 거기서 울고있는과부를 보시고, 청년을 다시 그 어머니의 품으로 돌려주셨습니다.
여기서 누가가 말하는 예수님은 어떤 분이실까요?

첫번째로 예수님은 우리를 찾아오시는 분입니다.
그 당시 나인성의 길은 외길로 예수님과 장례행렬이 마주치는 길이었습니다. 이게 우연같지만, 원어 해석을 보면 예수님께서 오실 때 이 일이 일어났음을 누가가 문법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4장 3절과 4절에도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주님께서 의도적으로 사마리아 지역을 통과하셨다고 나오고, 그래서 수가성의 여인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인간이 신을 만나기 어렵다는 것을 철학에서는 불가지론이라고 표현합니다.
하지만 기독교는 하나님께서 찾아오심을 이야기하고, 그래서 기독교를 계시의 종교라고 합니다.
어떤 새신자가 간증을 하였습니다.
다 큰 자녀를 잃어버려 희망이 없어질 때, 옆집 아주머니의 권고로 교회에 나가보았다고 합니다.
거기서 예배시간에 목사님 설교가 자기 마음을 아는 것처럼 느껴지고, 예수님의 구원의 말씀에 감동을 받고 예수를 믿기로 작정을 하였습니다.
여러 해 동안 신앙생활을 하다, 다시 간증을 하게 되었습니다.
자식의 사망 후 죽음과 같던 어느날, 옆집 아주머니를 통해 주님을 만나고, 그 뒤로 주님께서 내 삶을 인도하셨습니다. 
이 두 간증은 비슷하지만, 다른점이 한가지 있습니다.
처음에는 내가 중심이 되어 예수를 믿었지만, 나중에는 주님께서 이것을 인도하신 것임을 깨달은 것입니다.
이렇게, 내가 믿고 내가 감동받고 내가 선택한 것 같지만, 알고 보니 내가 아닌 주님께서 오신 것이었습니다.
오늘도 주님은 찾아오십니다. 닫힌 내 마음과는 상관없이 오십니다.

두번째로 예수님은 인간을 불쌍히 여기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청년을 잃은 어머니를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불쌍히 여기시다는 단어는 스플랑크리조마인이라는 단어입니다. 이 단어는 창자가 끊어지고 뒤틀리는 듯한 아픔을 표현한 것입니다.
우리가 중보기도할 때 우리에게 부딪혀오는 중보기도카드가 있습니다. 그 기도는 보통 우리가 고통스러웠던 그 아픔인 경우가 많습니다.
과부로 살던 어머니의 아픔. 그 아픔을 주님은 바라보셨습니다.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까지, 외형과 내면까지 모두 함께 보아주셨습니다.
아들이 없으면 구걸이나 몸을 파는 것 밖에 없던 그 과부의 삶. 그 미래까지 보신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청년에게 가셨습니다.
그 불쌍한 마음으로 가까이 가셨습니다.
그리고 그 관에 손을 대셨습니다. 율법적으로 부정한 것이지만, 그 부정의 의미는 사망과 저주이지만, 주님께서 그 부정함을 감당하셨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천지를 창조한 그 말씀을 그 청년에게 말씀하십니다.
달리다굼이라 말한 소녀에게처렴 말씀하십니다.
그 사람을 불쌍히 여기시는 예수님의 모습이 여실히 드러났습니다.
우리가 사랑하면, 먼저 그사람을 바라봅니다. 그리고 다가갑니다. 그리고 말합니다. 그렇게 예수님은 이 과부와 청년에게 다가오셨습니다.
우리가 예배를 드릴 때, 말씀으로 인생이 바뀌었다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것이 심리학적인 방법론으로 심적 안정을 얻은 것도 없지 않겠지만, 그것보다도 주님께서 만져주셨기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안요한 목사님은 열심히 살던 중 중도실명을 하게 된 목사님이 계셨습니다. 두번의 자살기도에도 실패한 그는, 절망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게 되었습니다. 거기서 하나님이, 지나가던 청년을 통해 여호수아 1장 7절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이야기가 영화와 책, 노래로도 나왔는데, 그 노래는 윤복희씨가 불렀던 노래였습니다.
그 노래의 가사처럼 나를 만나고 바라보시고 찾아주시는 예수님. 그 예수님을 힘입어 다시금 여러 활동을 하게 되었습니다.
주님의 긍휼과 불쌍히 여기심이 우리와 함께 할 수 있길.

세 번째로 예수님은 생명과 소망을 주시는 분이셨습니다.
13절에 주께서 라는 말씀은, 퀴리오스 라는 단어는, 보통 남들이 다른 저자의 표현을 옮길 때 쓰이지만, 여기서는 직접 사용하신것으로 나왔습니다.
부활 이후 사용된 단어를 여기서 직접 사용한 것은 주님께서 직접 하신 것을 더 강조하는 내용이었습니다.
열왕기상과 누가복음 1장 68절의 내용처럼, 큰 일을 행하시고 죽은사람을 살리시는 하나님이라는 것을, 질병과 사망권세를 해결하신 분이라는 것을 누가는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 일들은 에스겔 37장의 해골들을 살리시는 것을 연상케 하시고, 요한복음 6,63, 벧전 1.23절의 말씀처럼 육신의 굴레를 이기시는 주님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우리의 생명은 썩어질 것으로 되어있진 않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예수로 소망을 갖도록 말씀하고 계십니다.
저에게 죽음이 실존적으로 다가온 것은 아버지의 사망이었습니다. 많이 힘들었던 시기, 계속되는 어려움이 죽음으로 끝나는 시기. 내 감정을 알류미늄 호일처럼 꼭 쥐어서 내면의 깊은 금고안에 박아버렸습니다. 감정이 없이 그냥 해야할 일들만 하던 사람이었던 나. 아무런 의미도 없는 삶이었습니다.
그러던 중, 팔을 꼬집어 보라는 말씀이 들렸습니다. 그리고 그 아픔을 어디서 이야기하느냐 라는 물음이 들려왔습니다. 팔이 아파도 입에서 아픔을 표현하는 것을 보며, 예수님도 나의 아픔을 아파하는 것이구나 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그 일로 다시 살아가기 시작했습니다.
그 아픔을 경험하자, 절망가운데 사는 산동네 분들에게도 사랑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분들 덕에 유학을 했고, 작은 사목사례비를 그분들에게 열심히 연탄 세장씩이라도 보냈던 시기. 그 아픔을 겪었기에 내가 아닌 주님께서 역사하시는게 가능한 일들이었습니다.
말슴에는 힘이 있습니다. 그 지혜가, 나의 어려운 상황에서 힘이 되어줄 수 있습니다.
누가복음에서 전하는 이야기. 그 주님과 만나길 바랍니다. 고민하면 내 생각으로 , 기도하면 주님의 생각으로 만나게 됩니다. 고민이 아닌 기도하는 삶을 살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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