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 4부예배
차명목사님
제목: 역설의 하나님 역전의 하나님
고린도후서 6:1-10
<요약>
어려운 상황에서도 항상 기쁘게 이겨낸 바울. 그 바울처럼 우리도 하나님의 은혜를 발견하고 하나님의 삶의 원리를 택하며, 교회를 먼저 생각하고 우리의 살믈 살아가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노래하자.
<본문>
1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로서 너희를 권하노니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
2 이르시되 ㄱ)내가 은혜 1)베풀 때에 너에게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3 우리가 이 직분이 비방을 받지 않게 하려고 무엇에든지 아무에게도 거리끼지 않게 하고
4 오직 모든 일에 하나님의 일꾼으로 자천하여 많이 견디는 것과 환난과 궁핍과 고난과
5 매 맞음과 갇힘과 난동과 수고로움과 자지 못함과 먹지 못함 가운데서도
6 깨끗함과 지식과 오래 참음과 자비함과 성령의 감화와 거짓이 없는 사랑과
7 2)진리의 말씀과 하나님의 능력으로 의의 무기를 좌우에 가지고
8 영광과 욕됨으로 그러했으며 악한 이름과 아름다운 이름으로 그러했느니라 우리는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고
9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아 있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10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66년전 나무로 지은 28평의 예배당이 세워졌다.
그 후로 성도들의 인고와 헌신으로 지금처럼 아름다워진 교회, 특이하게 청년이 많은 교회가 되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이고, 이름없이 빛도없이 헌신한 사람들 덕분이다.
자신의 이름이 드러나기보가 하나님이 드러나길 바란 사람들 덕이다.
우리는 누구나 자신의 이름을 알리기 위해 여러 방송매체에 나오는 등 부던히도 노력하지만, 오히려 그 이름보다 더 주님을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오늘은 어떻게 그런 식으로 역전되는지 알아보자.
고린도후서는 바울이 자신의 말을 따르지 않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사도됨을 변증하며 이야기하는 편지이다. 그당시 고린도 사람들은 무명한 사람인 바울을 별로 존중하지 않았다. 유명한 달변가들이 많은 그리스 지역에서 그리스도만 높이고, 자신의 병도 고치지 못하고, 맨날 예수밖에 자랑할게 없다고 해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실 빌립보서 3장 5~6절을 보면 율법으로는 흠잡을데 없는 유대교에서 대단한 사람이었다.
교회를 박해하는데는 누구보다 빠르고, 기독교인들을 박해하기에는 매우 잘했다.
하지만 다메섹에서 주님을 만나고 빌립보서 3장 7절부터 이어지는 예수만을 아는 사람으로 변화되기 시작했다.
복음으로 세상을 바꾼 역전의 하나님이 된 것이다.
유치환시인의 깃발을 보면 소리없는 아우성이라는 역설적 표현이 나온다. 지금 설교하는 나는 유명할까? 어떻게 보면 대형교회에서 설교하니 유명하다 할 수도 있고, 유튜브에 안나오니 안유명하다고 할 수도 있다.
그런데 청년부 하면서 한가지 느낀건, 설교자가 죽어야 설교가 살아나고, 회장과 임원이 죽어야 부서가 살고, 스탭이 죽어야 팸이 살고, 리더가 죽어야 셀이 산다.
참 불편한 역설의 진리이다. 이런 역설의 상황에서 어떻게 믿음을 지킬 수 있을까?
오늘 본문인 고린도후서 6장에는 바울이 겪은 고생담이 있다. 하나님으로 인내하며 견딘 이야기를 한다. 4절과 5절에 매맞음과 난동 등 여러 가지를 참으며 살아간다고 한다. 뒤에 11장에서도 유대인들에게 39대씩 5번 맞았다고 한다.
우리가 보면 그냥 스쳐지나가는 구절 같았지만, 우리도 선교지에서 맞아본 적은 없을것이다. 채찍과 돌을 맞고 선교하다 배가 파손되어서 망망대해를 표류하고... 수차례 밤을 지새우고 추위에 떨고 헐벗었다고 한다.
그런 상황 가운데서 믿음을 지켜낸 원동력은 무엇일까?
첫째로, 하나님의 은혜를 발견하고, 하나님을 우리의 삶의 원리로 선택했기 때문이다.
고린도후서 1장 12절을 보면 하나님의 거룩함과 진실함으로 행하되 육체의 지혜 대신에 하나님의 은혜로 행하라고 한다. 또한 6장 1절에서는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고 말하고 있다.
우리가 말씀이나 찬양으로 자주 듣는 은헤가 무엇일까. 성경의 은혜는 호의 친절 자비 긍휼 등으로도 바꿀 수 있고, 하나님이 값없이 주시는 선물을 뜻하기도 한다.
조건을 달지 않으시고 구원과 영생을 주시는 하나님의 초월적인 사랑. 그게 은혜이다.
종교개혁가 깔뱅은 구원의 은혜를 전적인 하나님의 선물이요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과 사랑으로, 불가항력적인 은혜라고 한다.
이것을 나의 표현으로는 불가항력적인 사랑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다.
우리가 연인 사이에는 불가항력적인 사랑을 요청하기에는 어려울 것이다. 이제 생후 480개월이 되어가는데, 여태껏 살면서 불가항력적인 사랑을 겪어본 적이 아마 부모님 한분이었을것 같다.
지금도 생후 970일과 40일 된 아이가 있는데, 아이를 낳으니 나의 모든 취미생활등을 포기하게 된다. 가시고기처럼 아이를 키우는 삶을 살며, 하나님의 사랑을 어느정도 알게 될 것 같다.
신생아와 3년정도 된 아이의 차이는 신생아는 아무런 고맙다는 생각도 못한다. 단지 먹고 자고 싸고 울고 할 뿐이다.
하지만 3살 아이는 고마움을 느낄 줄 안다. 같이 밤에 이야기를 하고 이부자리를 봐주는 시기. 너무 좋고 폭신하며, 아빠 폭신한 이불 깔아줘서 고마워 라고 한다.
이때 매우 찡한 느낌을 느꼈다. 파워 TJ인 성격에도 불구하고 감동을 하였다.
이렇게 자녀의 사랑을 느낄 때, 하나님의 마음은 어떠하실까.
하나님의 성경의 원리는 간단하다. 하나님을 신뢰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해라. 굉장히 간단하다.
그런데 왜이리 신앙생활은 어려울까?
바로 내 마음대로 해석하는 내가복음을 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갖고 계신 뜻이 아닌 내 뜻으로 하기에 점점 어려워지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신앙의 동력이 떨어지고 점차 믿음의 선택을 못하게 된다.
갓난아이같은 믿음을 가진 사람은 믿음의 선택을 주저하게 된다. 아직 은혜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신앙이 성장할수록 하나님을 경험했기에 고난과 시련 중에서도 하나님에 대한 믿음의 선택을 하게 된다.
내가 복음의 중심이 된 것이 아니라 주님이 중심에 있는 하나님의 삶의 원리로 따라가는 삶을 살자.
두 번째로, 하나님의 교회를 먼저 생각하며 성전인 우리의 삶을 살아가야 한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공동체를 의미한다. 보통은 외형적 건물을 공동체라 생각하지만 우리 한명한명이 내적인 교회라고 생각하자. 에클레시아는 하나님이 세상에서 불러모은 자들이다. 신약성경의 요한복음을 보면 포도나무와 가지로 표현하고 있다.
우리가 영적인 문제가운데 있다면 무엇을 먼저 생각해야 할까. 고전 11 28절을 보면 추위와 고통보다 교회를 염려하는 것이 더 먼저 떠올랐다고 한다. 그 염려가 바울의 마음을 짓누를 정도라고 한다.
우리가 공동체 안에서 이런저런 어려움을 겪거나 힘든 상황을 겪을때 주님의 공동체를 먼저 생각했으면 한다.
바울은 자신의 어려움들에 대해서 신실함으로 반응했다. 고후 6장 8절에 의의 무기들을 갖고 임한다고 한다.
우리가 마음속에 가장 관심갖고 사랑하는 대상은 무엇일까? 나의 경우는 여러분이다. 솔직히 그렇다. 애정과 애증이 많다. 하지만 청년부 7년차 목사로서 가장 큰 염려이기도 하고 가장 큰 기쁨이기도 한다. 다 큰 어른 같지만 아이같은 사람도 많다. 그들이 이 공동체를 어렵게 만드는 것 같다. 독특하거나 이슈를 만드는 지체도 있다. 그렇게 마음이 어려울 때, 주님께서 핏값으로 채운 이 공동체를 생각하길 바란다. 그리고 나라는 성전을 바라보자.
바울은 어려움이 올때 먼저 자신이 깨끗한지를 점검하고,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며, 성령의 열매를 간구했다.
왜 교회를 먼저 생각해야 할까? 교회는 유기체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부족할지라도 우리를 창조한 하나님을 믿으며 나가야한다.
목자되신 주님 없이는 우리는 한걸음도 나가기 하ㅣㅁ들다. 그래서 우리는 머리되신 예수님을 따라 우리 교회 모두가 함께 나가야 하는 것이다.
혹시 인생의 고난에 있는가. 홀로 낙심하지 말고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마음으로 서로에게 비빌 언덕이 되어주었으면 좋겠다.
세번째로 우리는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감사의 노래를 해야 한다.
본문에 바리새인과 세리가 나온다. 예수님은 자신을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자는 높아진다고 한다.
자신을 높이는 바리새인보다 세리의 기도를 더 원한다. 우리는 한주간 어떻게 보냈나. 불편하고 역설적인 상황에서 어찌보냈나.
감사는 상황에 따라 하는 것이 아니다. 좋은 일이 있을때 감사하고 하는 것은 신앙이 없는 사람도 하는 것이다.
신앙인의 감사는 십자가의 역설로부터 나온다. 세리의 고백처럼 죄인인 나를 긍휼이 여겨달라는 것. 그 죄인을 위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 그렇게 역설적인 십자가로 감사할 수 있는 것이다.
교회의 사랑은 예수그리스도 그 자체이다. 예수님으로 인해 은혜를 받을 수 있다.
우리는 이미 은혜받은 사람이고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사람이다. 그러기에 하나님을 찬양해야 하고, 하나님의 방식을 따라야 한다. 그렇게 은혜 안에 머물 수 있도록 나가야 한다. 하나님의 방식은 무엇인가. 사람의 방식을 버리고 한나미의 말씀 위에 새로 서는 것이다. 7절에 나온 것처럼 진리와 함께 하는 것이다.
말씀을 정리하려 한다. 세상에서 인생역전을 한 사람들은 한 시대를 잇는 패러다임과 다른 생각을 한다.
이것이 성경에서도 그렇다. 하나님의 원리를 생각하자. 안팍에서 하나님을 보며 생각하자. 하나님의 감사의 노래를 들으며 감사를 표시하자.
6월 큐티특새를 하며 신기한 경험을 하고 있다. 이상하게 피곤하지 않다고 한다. 왜 그럴까 생각을 해봤더니, 노래할 수 없는 척박한 상황에 새벽을 깨우는 말씀이 우리의 영혼을 소생케 하는 경험을 하고 있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고후 6장 9 10절을 보자. 바울의 이 역설적인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 되길 소망한다. 이해할 수 없는 역설적인 수많은 모든 상황 속에서 우리의 삶과 신앙을 역전시키실 복된 하나님을 소망하며 살아가자.
동안교회 주일 4부예배 말씀 기록_240623 (0) | 2024.06.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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